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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아탐 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8

 

 




인위적으로 색을 넣지 않은 유리는 담기는 것에 따라 제 몸의 색을 뒤바꾼다. 바꾼다는 표현도 어쩌면 옳지 않을 테니, 당연한 것을 굳이 표현과 묘사에 가깝게 생각하는 일이 이상할 것이 더 맞는 말일 테니. 무심히 지나가는 생각 하나를 그렇게 흘려낸다. 상황과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편할 것임을 아나 이토록 살아온들 그리 해본 적이 없다. 없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시도라고 해보고 싶은 건 작금의 상황이 여러모로 사람을 붙들고 늘어지며 피곤하게 만드는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긴다.

사람의 장례식에, 그것도 전 부인이었던 이의 장례를 막 치른 찰나에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함을 아나 정말로 그 이상의 감정이 찾아오지 않았다. 에녹은 내외로 알려진 자신의 성정이 무심하고 무감하다는 것에 한 번 감사를 표해야 하나 싶은 시답잖은 감상을 느낀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장례식에 찾아와 준 이들 앞에서 슬퍼하거나 울지 않았어도 누구 하나 흘기거나 탓하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상념이다. 죽은 이에게는 감히 사죄해야 할 감상이겠으나 이미 눈앞에 없고 이승에 존재치 않으며 땅 아래 관 속에 갇힌 이에게 사과가 닿지도 않을 노릇이다. 반대로 본인이 죽었다 하더라도, 이름뿐인 배우자는 같은 생각을 하였겠지. 죽음에 다른 유감이 없으니 정석에 따르는 절차와 사람들을 맞으며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에 피곤함을 느끼는 것 똑같이 말이다. 그리 단언할 수 있었다.

그것뿐인 관계였으므로. 정략혼이라 할지언정 경우에 따라서는 진심으로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거나 호의를 담거나, 관계를 구축해나갈 수 있었겠지만. 에녹은 사람을 그런 호의로 옆에 두어본 적 없는 인간이다. 전 배우자 역시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던 것은 이해가 일치해서 편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편함’ , 이라고 할 수 있을 단조로운 정의의 인간과 관계. 단조롭게 진행되고 당연하게 끝을 내리는 장례식.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며 인사하고,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속삭이던 평가와 감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관을 안치시키는 풍경. 하얀 꽃이 대비를 이루는 거뭇하게 물드는 시간을 통틀어서. 그 모든 것이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그나마 이어져 오던 가까운 인간의 결말과 종막을 낙인찍는 듯했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누군가 읊었던 구절 하나가 문득 입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머무른다. 소리 없는 마침표를 찍은 시점에서 유리잔, 정확히는 와인잔이라 불러야 할 것이 제게 내밀어진다.

“이건,”

“조금이라도 휴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의미에서, 요.”

투명한 와인잔에 담긴 건 붉은색의 포도주. 건네주는 이의 손끝은 검은색의 면장갑으로 덮여있어 색을 알아볼 수 없다. 손으로부터 조금 더 시선을 올려보면 조금 더 색채가 진한 붉은색의 눈을 가진 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 에녹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게 호의인지 탐색인지 결론짓기 대신에 잔으로 시선을 돌리기를 택한다.

프시케 O. 발렌티온. 눈과 정반대의 파란 색채를 가진 사람은 웃는 게 더 많은 사람인 마냥, 도무지 다른 표정이 더 보일 것 같지 않은 이였다. 이런 날이어도 속을 알 수 없을 것으로 덮어 씌우고 있다는 감상이 진하다. 침묵과 묵상을 요구하는 시점에 있어 어색하기보다는, 그것보다도 더 어울리는 모습이 따로 있다는 쪽에 가까웠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나긋한 말투에 호의를 녹여내면서, 웃음과 시선을 담는 것은 꼭 현실의 무던하고 있을법한 인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동화에나 더 어울린다는 쪽이 나은 표현일 것이다. 그런 이와 별다른 관계를 녹여내었다기보다는, 서로 속한 가문에서 진행하는 친교에 그치는 사이였지만. 에녹은 문득 발렌티온 가와 있었던, 그리고 진행하는 일들을 되새기려다 그만둔다.

장례식에 찾아온 손님. 혹은 손님이라기에는 애매한 상대. 식은 끝났으나 그가 살아가는 생은 여전히 이어진다. 그렇기에 할 일은 아직 많다. 업무적인 일로도, 서류상의 일로도. 조금이라도 내일의 일정을 한 점 덜어내려면 바로 칩거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자택의 집무실로 바로 요청한 것은 본인이었으나 상대가 거절하지 않은 것에 이런 생각도 포함되어 있을 줄은 다소 예상 밖이긴 했다.

건네진 잔을 받은 것에 큰 이유는 없다. 단지 술이 휴식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대답하기에는 밀려 쌓인 피곤함이 정말로 가시지 않았던 탓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유감이 없다고 한들, 있었던 존재가 사라지는 게 크게 상관없다고 한들 사람이 죽고 묻히는 일에 정말 아무렇지 않기란. 어렵다는 것은 자신이 다만 인간이라는 반증인 것 같았다. 죽은 이를 깊이 추모하는 것도 아니면서 혼자서 마음이라도 덜고 싶은 이기적인 반증.

그래, 이런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일단 뭐라도 다음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과히 신경 쓰이게 해드린 모양입니다.”
“평범하게 그렇게 보였을 뿐인걸요.”
“처음 듣는 평가라고 해도 될는지.”
“하지만 정말로 그리즐 씨는 제법 알기 쉬운 축이리라고 생각해요.”

자택의 사용인이 그새 배치해두었던 것일까. 옆에 놓인 와인병을 훑는 시선에 생각이 그대로 티가 나기라도 한 지 대답이 곧바로 돌아온다.

“피곤하시잖아요.”

사람이 죽어서 겪는 일련의 모든 것들이. 꼭 그런 뒷말이 이어질 것 같았으나 더 소리가 되어 닿는 것은 없었다.

신화 속에서 호기심으로 괴물의 정체를 밝히려 했던 이의 이름을 그대로 가진 사람은, 단지 사실을 말하는 듯 그 이상의 다른 의미 없다는 듯이 발음했다. 신화와 실제 살아있는 사람은 다르다는 걸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굳이 그럴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고. 시선이 꼭 사별하여 방금 배우자를 땅에 묻고 온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계약이 사고로 파기되어버려 남겨진 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한가로운 채로 있으면 오히려 나쁜 말에 얽힐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렇게 말을 옮길 사람들이 여기 더 있어 보이지는 않고, 시시한 일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없으니까? 크게 신경 안 써요.”
“평소에도 그런 편입니까?”
“아마도, 하지만 아니라고 했어도 상관없다고 하실 거면서.”

애매한 대답. 더불어 자신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뉘앙스의 대답. 에녹은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입에 닿는 잔의 질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새빨간 향의 와인은 그다지 입에 맞지 않았다. 애초에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텁텁함이 감도는 것이 진실로 맛의 감각인지 자신의 감정이 녹아든 탓인지 알 수도 없는 건 본인의 탓이겠지만.

“내가 알기 쉬운 부류의 인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법 쉬워요, 다 티가 나는걸.”

사이를 두고, 프시케가 와인잔을 손으로 짚었다.

“지금처럼. 마음에 안 든다는 눈.”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하는 작은 소리가 이번에는 분명히 뒤따라 나왔다. 물음이라기에는 속삭임에 가까운 말의 나열이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이가 괜스레 하는 말에 더 가까워 보이는 종류.

결국 옆에 누군가를 두지 않는 게 여러 방면에서 효율적이라겠다던가, 이후의 뒤처리라던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갈 말들의 예시라던가. 답이 될 수 있을법한 예시는 이외에도 더 여럿 있겠으나. 에녹은 침묵을 답으로 택했다. 상대는 자못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눈치다.

에녹은 다시금 예전 발렌티온과 있었던, 그리고 현재에 있는 걸 생각한다. 발렌티온과 그리즐의 관계에서 당시의 어린아이들을 두고 정략혼의 상대로 예정되었던 과거를, 그러나 사정이었는지 상황 탓이었는지 어른 개인 사이의 감정이 있던 탓인지 무마되어 흩어진 것을. 의미 없는 되새김이다. 어쩌면 굳이 장례 마친 당일에 초대한 것도 일이 진실한 이유가 아니라 단지 핑계에 불과하고 지금에 프시케가 저를 보는 것에 동정이 포함된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 전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굳이 알아서 자신에게 득이 되는 건 없을 것도 잘 안다.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이 세상에는 여럿 좋은 편인 법이므로.

“조금만 쉬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는 게 낫겠군요. 됐습니다, 탐색이든 뭐든.”
“탐색 아니었는데. 그렇게 보였어요?”
“𝌀𝌀.”
“또 그렇게 본다.”

잔 하나가 비워지는 데에는 그만큼의 짧은 대화가 오가야 했다. 일방적인 파악과 회피일지도 모르겠다마는.

“예전부터 그랬었으니까, 에녹은.”
“옛날 얘기를.”

맛도 향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오래된 와인 병을 저만치 밀어두는 손이 단호했다.

더 이상 잔을 받지 않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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