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ddle of nowhere
ㅊ 씀.
“갑자기 웬 술입니까?”
이 짧은 침묵을 먼저 깨트린 건 내 입에서 흘러나온 벙찐 목소리였다. 유리가 부딪혀 흔들리는 소리에 한참이나 시선을 둬야 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의 출처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맞은 편에 앉은 상대가 들고 있던 와인병의 입구를 유리잔에 기울이고 있었다. 질문에는 아랑곳않고 잔을 천천히 채우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는 내용물을 그럴싸하게 담으려 열중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두개의 유리잔에 담긴 양을 눈대중으로 비슷하게 맞추려는 중이었다거나. 어찌되었든 그간의 수많은 경험으로 추측하건대 대답을 채근해도 무시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 판단했다. 분위기를 깬다며 타박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 아니겠는가.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느슨하게 기댄 채로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진중한 저 표정이나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어차피 마시지도 못할텐데요.”
“그냥 기분내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갈하게 놓인 유리잔에 대고 흡족한 기색이 돌았다. 검붉은 빛의 와인병을 내려놓은 낡은 테이블이 저 혼자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더 완벽했을텐데 그건 아쉽게 됐다.
나는 군말없이 당신이 마련해준 잔 하나를 앞으로 끌어왔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 기분나쁠 정도로 새붉은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수면을 눈높이에 맞춰 들어올리자 어떤 확신이 스쳐 지나갔다. 삼키자마자 전부 토해내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다. 목을 축인다고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삼켜본 게 언제였더라,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제와선 중요한 질문도 아니었다. 말마따나 기분내기일 뿐이라면 이 두 개의 붉은 유리잔은 얌전히 테이블 위를 지키고 있는 게 최선일 것이다.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볼품없는 빛을 냈다. 눈이 따갑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한 빛이었다. 그래도 거슬리는 소리가 남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시선을 돌려 마주한 창문은 그 너머가 여느 때처럼 불투명했다. 작은 물방울들이 세상을 흐릿하게 만들어둔 탓이다. 안개가 이 주변을 뿌옇게 칠해두는 건 어제오늘만이 아니었는데, 호수 가까이에 위치한 마을인 덕에 이곳은 밤낮없이 자욱한 안개에 시달리고 있다. 한 치 앞을 분간 못할 정도로 시야가 깜깜해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라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 이상 앞을 헤매지 않는 것처럼 결국은 신체가 적응할 문제였을지도 모르고. 글쎄, 조금 솔직해지자. 방금 건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에 가깝고 수십번을 마주 한들 끔찍한 기분을 덜어낼 수 없는 문제도 확실히 있었다.
"음.”
가령 지금처럼 말이다. 창 너머를 가만 응시하던 나는 달갑지 않은 침음을 뱉고 말았다. 창밖이 붉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 그새 비위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엄살은.”
“완전 빈말은 아닙니다. 비만 오면 금세 속이 안 좋아진다니까요.”
당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어도 나는 애써 농담어린 투로 대꾸했다. 핏방울이 창을 거칠게 때리는 소리를 백색 소음마냥 두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다. 붉은 빗방울이 내리는 마을, 안개가 쉽사리 걷히지 않는 거리, 그리고 죽은 자가 계속해서 돌아오는 공간. 이곳을 무엇이라 확실히 정의내리는 것은 오래 전에 포기했지만 적당히 설명하려 해도 이 세 문장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생각을 길게 나열하는 법을 잊어버렸거나,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거다. 확실한 명명조차 할 수 없는 공간에 제 발로 돌아왔다니 제정신은 못될 일이었다. 아주 잠시 힘빠지는 웃음을 걸었다. 어쩌면 나는 세번이나 새로 맞이한 일생에서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시몬 데이먼의 마흔 일곱번째 생일과 두번째 기일을 축하하며.”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쑥 당신이 제 몫의 잔 하나를 들어올렸다. 뜬금없는 축하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힐긋 던지는 눈짓에 담긴 재촉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흘러나오는 한숨을 최대한 숨겨둔 채로 느지막이 손을 뻗어 유리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당신이나 나나 들고 있는 잔을 입가로 가져다 두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시지도 못할 그림의 떡을 앞에 둔 것치고는 꽤나 청명한 소리가 났다.
“제 생일은 이미 3개월이 훨씬 지났습니다, 조슈아.”
“알아. 이보다 적당한 멘트를 찾지 못했을 뿐이네.”
“웃긴 사람이야…”
허탈한 실소를 던지고 슬며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비위에 거슬려 자리를 뜰 작정은 아니었다. 당신다운 대답이라 기분이 상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스산한 붉은 빗방울보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지는 당신 쪽에 적응이 빨랐던 모양이다. 나는 일어난 자리에서 고작 몇 걸음만을 움직여서 창에 달린 커튼을 넓게 펼쳐두었다. 벽면에 붙은 오래된 창틀은 마감 처리도 채 덜 되어있었는데, 낡은 상태로 오랜 시간 방치한 탓에 간격이 틀어졌는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당기는대로 요란스럽게 덜컹거렸다. 잘못 건드렸다간 헐거운 유리창이 덜컥 빠져버릴 꼴이었다. 사람이 자주 오가질 않으니 털어내도 금세 쌓이는 게 먼지라 내색은 않아도 여러모로 고생스러웠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지만 이는 얄궂게도 죽어버린 하루들이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는 반증과도 같았다.
“가끔 마을에 공중전화가 울리는 거 압니까?”
허공에 휘날리는 먼지 사이로 손을 털어내며 내가 물었다. 예상대로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냐는 당신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려주겠다 선언하는 그 커다란 아량에 괜히 더 오랫동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몇번 받았었는데… 듣고 있는 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점점 확신이 안 들어서 관뒀거든요.”
“원래 야외에서 전화를 주고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아닌가. 자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 지적하는군.”
“그런 의미가 아닌 줄 알면서 그러십니다.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아니라는 것도 슬슬 익혀두세요.”
“혹시 사물에게도 자기 능력 결정권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보통 안 하죠, 그런 생각.”
딱잘라 답하자 상대의 눈이 불만스레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그 뒤로 수 초간은 사물 차별주의자라는 이상한 매도를 들어야했지만 늦지 않게 말하고자 했던 본론을 읊었다.
“전 그게 외부로 나간 사람들의 의지가 이 마을에 닿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드물게요.”
그러자 맞은 편의 그는 딴청이라도 피우는 것마냥 앞에 놓인 유리잔의 표면을 손끝으로 몇번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래. 언젠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상 현상일테지.”
이어지는 뒷말까지는 약간의 간극이 있었다.
“그런데 내 솔직히 말해 이 표현은 썩 마음에 들지 않네.”
나는 저 시선이 무엇이 좇고 있는지를 안다.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저 단호한 말투에 담겨있는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이 마을에 발을 들였으나 또 다른 한계를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길을 잃게 만들며, 이상理想아닌 이상異常으로 남는 것을 반길 사람은 없다. 그러니 당신이 소리없이 외치는 주장은 명료했다.
이곳은 나아질 것이며, 행할 수 있으리라 믿으니 그렇게 될 것이다. 허공을 한번 훑고 돌아온 시선이 내게 단언하듯이 강조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이 화제로는 대화가 오래 이어지지 않았던 걸 다시 상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슬슬 시시한 티타임 놀이는 그만둘 때가 됐다. 로비의 문은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어 등을 돌려 걸어야 했고, 천천히 멀어지는 상대를 눈에 담은 채로 나는 몇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무슨 표정을 걸고 있는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당신은 실패에 조금 더 둔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들릴듯 말듯한 중얼거림을 뱉어두고 거리가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따라 걸음을 뗐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비는 그쳤다지만 피 웅덩이가 문턱 아래 고여있을 게 틀림없어 좋지 않은 핏빛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무거운 걸음이 바닥의 나무 판자를 밟았다. 낡은 나무가 끼익거리며 사방을 긁어대는 소리에 어느 순간부터 철버덕거리는 물기가 섞였다가 이후로는 아예 멎어 들었다.
사람이 전부 사라진 호텔 로비에는 붉은 유리잔 두 개만이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