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형상
머쯔 씀.
창문을 깨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센 바람이 몰아닥치던 간밤이었다. 제피로스는 늘 라몬보다 늦게 깨는 것이 습관이었으나 기분 탓인지, 날씨 탓인지 오늘은 드물게 일찌감치 정신이 든 참이었다. 작년 이맘때에도 이렇게 날선 바람이 분 적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지만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제 허리를 끌어안느라 배 앞으로 둘러진 연인의 손을 매만지고 있자면 자연스레 가벼운 손장난이 몇 번 오가고, 귓바퀴로 느른하게 잠긴 목소리가 달라붙어 온다. 그의 손을 깍지 껴 쥐며 잘 잤느냐 묻는 라몬에게 그는 대답 대신 맞잡힌 손에 짤막이 한 번 힘을 넣는다.
잠이 덜 깨 멍한 정신으로 며칠 전에 했던 대화를 되짚어 보자면 분명 오늘이 그의 생일이었다. 제피로스는 태어난 걸 축하하기에는 참 을씨년스러운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은 가을이고, 그러니 계절상 날이 얼마나 좋든 창밖의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었고, 사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십여 번의 생일 동안도 비슷했던 것 같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 냈다. 우짖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를 조금 더 끌어당겨 안은 라몬이 나직이 물었다. 오늘이 생일이지. 제피로스는 응, 하고 대답하며 몸을 조금 고쳐 누웠다. 뒷목 뒤로 얇은 숨이 간질하게 스쳤다.
무엇이 하고 싶느냐고 굳이 묻지는 않지만 허리 앞으로 둘러진 손이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라몬은 아무래도 오늘의 계획을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목뒤로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제피로스가 물었다. "서점에 갈까." 그 질문에 바로 돌아오는 답이 없어 조금 더 말을 이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아직 다 못 읽었어." 그리고 잠시의 간극 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안 들키게 소리 내서 읽어 줄게……. 만일 듣고 싶다면." 그러고 나서야 목 뒤켠에서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가자." 하고 간결히 돌아오는 답에도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잔뜩이었다.
오래간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길 경우 라몬이 주로 변하곤 하는 모습은 두세 가지로 정해져 있었는데, 오늘은 순한 인상의 갈색 머리 여성이었다. 그 낯선 외양 탓에 모르는 사람과 외출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것도 이제는 오래된 일이다. 며칠 전 제피로스는 이 여성의 모습에 이름도 새로이 붙여 주었다. 브리짓 씨, 가시죠, 하고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뚜렷한 웃음기는 없으나 라몬은 이것이 그의 농담 투임을 안다. 반대로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해도 자꾸 작업 거시네." 하고 돌아오는 음성은 누가 들어도 농조라 제피로스는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웃었다.
저택 바로 옆에 자리한 서점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하고 있어서, 제피로스는 종종 이곳 구석에 들어앉아 몇 시간이고 책장을 넘기곤 했다. 가끔은 혼자였고, 요즈음 들어서는 꽤 자주 '브리짓 씨', 혹은 아직 이름을 붙여 주지 않은 금발의 소년과 함께였다. 일전에 다 읽지 못했던 책이 꽂아두고 갔던 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덕에 수고할 필요 없이 금세 자리 잡고 앉아 읽을 곳을 찾아낸 제피로스가 라몬을 향해 손짓했다. 그가 가장 익숙하게 찾곤 하는 자리는 O 구역의 오른쪽 끝이었다. 거대한 책장과 책장이 맞닿아 기대앉기 좋은 구석을 만들어낸 구조였는데, 사람이 자주 오가지 않아 웬만해서는 방해받는 일도 적었다. 라몬이 들고 온 책이 무엇인지 힐긋 눈짓으로만 가볍게 살핀 그의 낯 위로 심드렁한 표정이 잠시 스쳤다.
"또 그거."
"앉기나 하거라."
"재미없네. 교수 같다."
"그야 교수였으니까."
시답잖게 이어지던 대화는 두 사람이 자리에 앉고 나자 자연스레 끊겼다. 라몬은 가져온 본인의 책 대신 제피로스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저번에 읽다 만 곳이 몇 페이지였는지를 되짚으면서 책장을 훑었다. 이윽고 그의 엄지가 책의 중간 어디쯤 멈추면 작게 목을 고르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나직한 어투와 정돈된 억양이 책의 대목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카테리나가 열띤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 한 번 들어 보세요.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전 지금 제가 그이를 사랑하는지 어떤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그저 그이가 불쌍하게 여겨질 뿐이에요. 이건 사랑의 증거치고는 나쁜 것이지요. 만약 제가 그이를 사랑했고, 지금도 계속 사랑하고 있다면 말이에요. 그럼 지금 전 그이를 불쌍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해야 하겠죠'……."
서점에서 집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뉘엿하게 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으면서 저녁 식사에 대해 생각을 하던 제피로스의 뇌리에 문득 주방 옆의 와인 창고가 스쳤다. 고민은 짧게 끝났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라몬을 부른 그가 물었다.
"저녁에 와인 한 병만 딸까. 생각해 보니 마침 나랑 같은 나이를 먹은 빈티지가 있어서."
그 질문이 의외였는지 라몬이 눈을 한 번 깜빡였지만 곧 흔쾌한 승낙이 돌아왔고, 제피로스는 본인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창고로 걸음을 뗐다. 와인 창고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근래에 와인을 생각할 일 자체가 없었던 탓인데, 더욱이 라몬 화이트하우스와 얼굴을 마주하고 술을 마시게 될 날이 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저 멀리서 그를 따라 느긋하게 걸어오는 라몬의 발소리를 들으며 제피로스가 창고를 눈으로 훑었다. 라 타슈, 로마네 생 비방, 에셰조, 몽라셰, 그랑에셰조, 리쉬부르……. 눈길이 병에서 병으로 옮겨갈 때마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지팡이로 로마네 콩티 한 병을 빼 들어 라벨을 확인하면 걸음 소리가 멎으며 가벼운 백허그가 된다.
"찾았나 보구나."
"응. 봐, 올해로 28년."
"기억력이 좋아."
"학교 다닐 때도 우수생이었거든."
밖으로 돌아가야 하니 이제 놓으라는 뜻으로 라몬의 허리를 팔꿈치로 한 번 쿡 찌른 제피로스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지팡이를 부드럽게 두어 번 더 휘두르고 나자 테이블 위로 금세 마개가 따진 와인병과 반이 조금 덜 되게 찬 와인잔 두 개, 잘게 잘린 까망베르 치즈 같은 것들이 올라와 놓였다. 테이블은 오랜 세월 동안 가문 대대로 내려온 집에 놓인 것들이 으레 그렇듯 몹시 크고 길었지만 단둘로도 허전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라몬의 건너편에 의자를 빼내 앉은 제피로스가 먼저 잔을 들었고, 곧 잔 두 개가 맞닿는 소리가 가볍게 실내를 울렸다.
입에 잔을 먼저 가져다 댄 건 라몬이었다. 오래되어 그런지 향이 좋다는 라몬의 평에 그가 별것 아니라는 양 당연하지, 경매에 내놓으면 이만 갈레온은 할 물건이니까, 하는 답을 했고, 라몬이 기겁을 해 병을 다시 들여다볼 때쯤 되어서야 제피로스가 첫입을 마셨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평범하고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바냐와 알료샤, 카챠의 이야기를 했고, 읽던 책을 끝내고 나면 다음에는 무엇을 읽을지에 대한 것이나, 내일 아침 식사 계획 같은 주제가 이어졌다. 그리고는 문득 짧은 정적이 있었고, 그 뒤에 라몬이 느릿하게 덧붙였다.
"내년에도 말이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
그 말과 함께 다시금 창문이 우는 소리를 냈다. 제피로스는 라몬의 뒤에 자리한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앙상히 마른 나뭇가지에 간신히 붙어 있던 낙엽이 거세게 부는 바람과 함께 우르르 떨어져 날리고 있었다. 어딘지 추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 마디와 마디가, 팔뚝 뼈를 이어 놓고 있는 관절이, 갈빗대 사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몹시도 서늘하다가, 가지에 붙었던 마지막 낙엽이 팔랑이며 떨어짐과 동시에 본래대로 돌아왔다. 환상통이 머무는 손끝을 가볍게 문지르며 제피로스는 직감한다. 스스로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도 '내년'은 같이 맞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때도 이번만큼 괜찮은 병을 따야겠네."
그러나, 길지 않은 간극 뒤에 그가 내놓는 대답은 미래에 대한 약속에 가깝다.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니까. 절박한 사람들만 무언가를 소망하듯이.
창밖으로는 여전히 바람이 울어대고 있다. 별이 뜬 이후엔 단순한 환상이 아닌 실제의 추위가 창문 새로 온통 기어들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라몬이 오늘 밤 역시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들어줄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전부 괜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