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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형태
​치이 씀.

1


203호에는 이상한 남자가 묵고 있었다. 모텔 ‘아멜리’는 가격이 싸고 빈민가 근처에 위치한 탓에 장기 투숙객들이 많은 건물이었는데, 때문에 투숙객들끼리의 친분 관계가 꽤나 공고한 편이었다. 헌데 그 남자는 가을치고는 유달리 추운 어느 날에 어딘가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들어와서 이백삼 호를 빌리고서는, 몇 달째 누구와도 친밀해지지 않은 채 그곳에서 무슨 식물처럼 존재하는 중이었다. 이백일 호의 해던이나, 청소를 도와주는 존이 그에게 말을 좀 붙여보려고 시도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모텔 아멜리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오직 이름뿐이었다. 그것도 숙박부에 적힌 가지런한 필체의 서명을 통해 파악한 것이었다. 남자는 무슨 글씨체 교정책의 모범이 될 듯한 아름다운 필기체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두었는데, 그 이름은 이런 구성이었다: R. Z. 알레테이아.

2


다른 이름을 쓰던 때는 까마득하다.

까마득한 기억을 되짚어 가면 그때의 남자는 라몬이라는 이름을 썼었고, 남자의 옆에는 ‘알레테이아’가 숨을 쉬는 채로 살아 있었다. 말을 걸어 주고 눈을 맞춰 주는 제피로스 트로이 알레테이아가 살아서, 옆자리에 있었다. 남자는 아직도 둘이서 함께 보냈던 제피로스의 생일을 기억했다. 가을치고는 추운 날이었고, 같이 와인병을 땄고, 생일치고는 시답잖은 얘기들을 입에 담았지. 그날 입에 머금었던 포도주가 어떤 맛이었던지는 가물거렸으나 와인 잔을 한 바퀴 돌리는 알레 테이아의 손이나 그의 목에서 나오던 나지막한 목소리 같은 것들은 지나치게 선명히 남아 있었다….

 

사실 그때쯤 말야.
우리는 네가 얼마 안 있어 죽을 걸 예감했었지.

그래서 그날 괜히 그런 소리를 한 거였다. 내년에도 같이 이러고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왜냐면 사람들은 당연히 이루어지는 건 소망하지 않으니까. 절박한 사람들만 무언가를 소망한다. 내일 아침에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자는 없지만 그렇게 바라는 거지는 있고, 지옥이 있기를 바라는 가해자는 없지만 그렇게 바라는 피해자는 있다. 그러니까 내년에도 같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게 그때 제일 절박한 것이어서 그랬다.

3


남자는 가끔 기도를 했다. 신을 믿지도 않는데. 알레테이아가 죽은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 눈을 감으면 두고 떠나온 집의 너무 많은 방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것들이 생각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 집의 그 방들을 생각하면 아주 많은 문 중 하나의 문에서 알레테이아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버리고 온 집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날의 밤에는 알레테이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 당연하게 나와서 자기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익숙한 걸음으로 창고에 가서 와인을 꺼냈다. 오늘 내 생일이잖아. 작년에 이렇게 같이 시간 보내자고 했는데…기억 안 나?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너무도 선명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의 안에서 알레테이아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축복은 망각인데 그는 그 축복을 한 조각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기도를 했다. 적어도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지 않게라도 해 달라고. 하지만 남자는 신을 믿지도 않았고 교회에 마지막으로 나간 것은 일곱 살 때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죽어버린 사람을 생각했고 그때마다 점점 더 약해지기만 했다.

 

 


4


203호에는 이상한 남자가 묵고 있었다. 모텔 아멜리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은 R. Z. 알레테이아라는 이름뿐이었는데 그것도 숙박부에 적힌 가지런한 필체의 서명을 통해 파악한 것이었다. 남자는 가을치고는 유달리 추운 어느 날에 어딘가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들어와서 이백삼 호를 빌리고서는, 누구와도 친밀해지지 않은 채 그곳에서 무슨 식물처럼 존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기 시작한 지 정확히 일 년이 지난날에, 알레테이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와 공용 로비에서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제대로 된 매너 같은 것은 갖추지 않은 채로, 그냥 머그잔에 술을 가득 찰 때까지 부어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런 식으로 마셔서는 술이 어떤 맛인지 알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창밖으로는 낙엽이 떨어지는 중이었고, 그의 옆에는 누구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남자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라몬 제피로스 알레테이아는 그날 모텔 아멜리를 떠났다. 죽은 사람에게 받은 이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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