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주
마야 씀.
모든 건 정적에 잠겨 있다. 자정에 가까워지자 하늘은 검푸른 천으로 덮이고 땅은 누구도 발을 딛지 않는다. 찾아오지 않는다. 텅 빈 건물, 그 가운데 텅 빈 레스토랑. 숨소리마저도 침묵하는 공간이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린다. 두 손에 들린 포크와 나이프는 숨죽여 반짝이고, 오래도록 방치한 요리는 온기를 잃은 지 오래다. 손님이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이 아니다. 칼리안 에우페베카가 지나치게 일찍 왔을 뿐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마음은 무엇이고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상 머릿속에서는 모든 일을 끝낸 후다. 그러나 감정이란, 언제나 끝난 일도 되풀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끝나가는 일을 번복하고자 애쓴다. 감정을 위하여 생각을 정리한다.
하나, 생각은 금방 끝을 맺는다. 멀리서부터 정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발걸음이 모든 걸 부수고 있다. 열린 문 저 너머, 복도에서부터 선명하게 들린다. 자신의 존재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음이다. 걸음에서부터 천성이 보이는 자다. 그가 온다. 숨을 삼킨다. 저를 구원할 동아줄처럼 쥐던 포크는 놓아도 나이프는 채 놓지 못한다. 감정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생각을 되풀이한다.
적에게 연약한 감정은 약점이 되기 마련이다. 연민, 동정, 다정, 슬픔…. 그중 사랑이라면 어떨까. 증오하는 상대를 향한 사랑, 증오를 능가할 만한 사랑이라면. 관계의 시작부터 쌓아온 해묵은 사랑이라면.
그리하여 그것을 기어이 파헤쳐졌다면.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걸음 하나부터 제 생각을 무너뜨리는 저자를 경멸한다. 증오한다. 혐오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롯하게 검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이목구비 가운데에 들어찬 짐승의 눈.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 소리도 없이 그를 부른다. 저자는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고 가까이서 볼 때는 두렵다. 남들은 반대로 평가할 것이다. 멀리서 볼 때는 두렵고 가까이서 볼 때는 지극히 아름답노라고. 하나,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안다. 그 점으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해야 하노라고.
그가 고개를 돌린다. 네가 거기 있는 줄 다 안다는 듯이 망설임 없는 시선이다.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는다. 어둠에서도 반짝이는 금빛 눈과 어둠 속에서 잠겨가는 보랏빛 눈이 닿았다가 엇갈린다. 엉킨 시선이 신호탄이 된다. 그가 훌쩍 다가온다. 발걸음과 같이 강렬한 존재감을 감추지 않는다. 다가와서 손으로 의자를 짚는다. 매끄럽게 당기고 앉는다. 차게 식은 테이블 위로 가볍게 누빈 눈이 칼리안 에우페베카를 향한다.
오랜만이야, 칼.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그가 묻는다.
보고 싶었다면 불렀을 리가.
보고 싶었다면 먼저 찾아갔으리라고, 칼리안 에우페베카가 답한다. 거짓말이다.
그가 앉자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일어난다. 흠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배우고 배웠던 배움을 반복한다. 걸음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곳을 고른 것은 좋은 선택이다. 흔들리는 걸음을 잡아준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미리 준비한 와인을 손에 쥔다. 매끄러운 태도로 다시 걸어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는,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는 그 모든 행위를 빠짐없이 지켜본다. 입가에는 미소를 내걸고.
너에게 식사 한 번 대접한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어. 오래도록 너를 외면했다는 사실도.
테이블에 와인병을 올린다. 오프너로 포장지를 잘라내고, 코르크에 스크루를 박아 넣는다.
너의 편지에 오래도록 답을 하지 않았지.
날카롭게 헤쳐진 코르크가 몇 번의 손짓 끝에 빠져나간다.
편지가 어제까지 72통이 왔어. 그걸 쓰면서 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생각했지.
와인병을 기울인다. 와인잔에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포도주가 쏟아진다.
답을 하기 위해 초대했다면 초대에 응한 보람은 있을까.
그늘 아래선 포도주도 핏물처럼 보인다. 와인잔 가득 채워진 핏물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찰랑인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생각한다. 이것이 피라면 누구의 피인지. 그간 베네딕트 에일나이트가 타인으로부터 갈취한 피일까, 칼리안 에우페베카가 십수 년간 고통스러워하며 흘린 피일까. 어쩌면 베네딕트 에일나이트가 자신을 내치는 그로 하여금 흘리기 시작한 핏물일지.
두 사람은 와인잔을 내려다본다. 모든 와인에 피가 차오른다. 기울이던 병을 바로 놓는다. 자리에 앉는다. 마주 보고 앉게 되어서야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가 입을 연다.
읽었다면 읽었다고라도 답을 달라고 요구한 적 있지만, 정말 답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날 바라본 시간이 더 길다는 걸 아니까.
얼마를 기다려도 넌 내 심정을 이해 못해, 에일나이트.
그는 그래, 하며 어렵지 않게 동의한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헤집어대던 자를 오래도록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보면서 매일 밤잠을 설쳤다. 희생적인 사랑의 산물로 태어나 그것을 평생의 상처로 여기는 자에게 알든 모르든 그것을 조롱하는 자는 독이었다.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십수 년이라니, 그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고통스러운 사랑을 자처한 자를 쉬이 이해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칼리안 역시 베네딕트 에일나이트를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자신이 그리도 헤집고 조롱한 자를 사랑하기 시작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드러내고 말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저 마음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침묵이 이어진다. 베네딕트는 차게 식은 요리들을 내려다본다.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올린다. 큼직한 고깃덩이를 나이프로 가른다. 붉은 단면이 드러난다. 하얀 접시 위로 핏물이 배어 나온다. 베네딕트는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내며 답한다.
나를 오래 기다렸나 봐, 칼? 이렇게까지 식은 건 처음 보는걸.
그렇다고 답한다면 기뻐할 셈인가.
기쁘지 않겠어? 나는 여기 오는 동안에도 네 생각을 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무슨 생각을 해?
어떻게 하면 내가 너를 절망하게 할까, 하는 생각.
상대의 마음을 할퀴는 것은 베네딕트 에일나이트만의 장기는 아니다. 칼리안 역시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구태여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칼리안 에우페베카 역시 기대하지 않는다. 시선이 테이블을 향한다. 음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제 몫의 와인잔을 든다. 와인잔을 돌린다. 소용돌이치는 포도주를 들여다보며 눈을 내리 깐다. 그러나 기민하게 구는 것은 두 사람의 습성이다. 먹고 침묵하는 동안 신경은 서로를 향한다. 그 또한 알아차린다.
이윽고,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상대가 나이프를 내려놓는 순간에 잔을 내린다. 핏기 잃은 입술을 달싹인다. 메마른 소리를 낸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 망설일 것도 없었는데.
흰 손을 뻗는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베네딕트 에일나이트에게 와인을 권한다. 내내 건조하던 얼굴에 그럴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나를 사랑한다고.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 베네딕트 에일나이트, 베네딕트, 벤. 친애하는 벤.
… 나는 너를 사랑하면서 분노, 증오, 경멸을 모두 감내해야만 했어. 그게 나를 좀먹는 줄 알면서도, 빌어먹게도 그만두지 못했어. 그만두면 모든 게 편할 텐데. 나는 네 편지를 받으면서도 너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과 매일 싸워야 했고, 그만 닥치고 꺼지라고 답장하지 못하고 받고만 있는 나 자신까지 경멸해야 했지. 그 심정을 네가 이해할까.
차분하게 늘어놓는 말에 양가적 감정이 배어난다. 목소리가 잦아든다. 미소가 가라앉는다. 그러나 말은 다시금 이어진다. 한결 생기를 되찾은 소리, 한 꺼풀 짐을 덜어낸 양 가벼워진 소리로 지껄인다.
잔에 독을 발랐어. 구태여 말하자면 독주가 되겠지.
내 답은 간단해, 에일나이트. 나를 사랑한다면 마셔. 마시고 죽는다면 그때는 내가 네 사랑을 받아들일지도 모르지. 운이 좋다면야 죽지 않고 견뎌서 내 사랑을 얻을 수도 테고. 그 정도 사랑도 아니라면 내 앞에서 영영 사라져.
베네딕트 에일나이트는 침묵한다. 금빛 시선이 앞에서 어른대는 잔을 응시한다. 머지않아 잘 만들어진 입술이 그린 듯한 곡선을 그린다.
네 고통을 아무리 말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느끼던 고통 이상의 사랑을 네게 줄 수 있어, 칼. 증명이 필요해?
단단한 손이 잔을 쥔다. 빙그르 돌리는 손길이 깔끔하다.
네 사랑은 언제나 뒤틀리고도 낭만적이지. 이미 독주보다 더한 독을 삼키고 있는데, 이걸 못 마실까. 사랑하는 칼.
달게 속삭이는 끝에 그가 잔에 입술을 댄다. 핏물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보랏빛 눈이 크게 뜨인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본다. 와인을 반쯤 마시고, 핏물 같은 와인이 붉게 번진 입술로 그가 웃는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잖아, 칼.
베네딕트 에일나이트는 제 잔을 내려놓는다. 상대 앞의 와인잔을 든다. 무심코 그를 막는 팔을 밀어내고, 그것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날카로운 파열음. 반짝이는 유리조각과 독주가 번지는 바닥에는 시선도 두지 않고 일어선다. 칼리안 에우페베카의 앞에 서서 몸을 기울인다. 숨결까지 맞닿을 거리에서 속삭인다.
정말 독이 든 잔을 내밀지도 못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