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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에 사랑과 증오를 담아
​크리시아 씀.

“……무슨 속셈이야?”

 


  칼리안 에우페베카의 연보랏빛 두 눈이 의구심을 가득 담았다. 현재 이 장소에서 마주한 두 사람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자면, 베네딕트는 저 얼핏 고요하고 맑아 보이는 눈동자에 그리 우아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고 넘치도록 담겨 경계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을 미치도록 좋아했다.

  마치 열 살짜리 짓궂은 소년이 좋아하는 또래 아이를 괴롭히는 듯한 유치한 악취미였지만 이건 그런 순수하고 귀여운 비유를 갖다 대기에는 지나치게… 지독하고도 끔찍했다. 적어도 칼리안 에우페베카라는 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럴 것이었다. (아마도 말이다.) 칼리안은 툭하면 제게 그따위 욕망을 품고, 그것을 제 앞에서 조금도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 베네딕트를 혐오했다. (이 역시 아마도지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인간과, 추악한 날것의 내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상대하기에 곤란할까?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는 빌어먹게도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품은 존재 중 가장 좋고도 아름다운 것만을 정성껏 다듬어 다른 이들에게 수줍게 내놓고는 하건만, 베네딕트는 자신이 소유한 것 중 가장 날카롭고도 질척하고 추한 것만을 대강 골라내어 그것을 억센 손아귀에 쥐고선 다른 이의 심장에 대뜸 내리꽂는 이였다.

  가끔 그는 실로 미움받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리고 정말 그것으로 인해 상대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진심으로 더없이 즐거워했다. 칼리안은 베네딕트를 그 누구보다도 미워했고, 그건 베네딕트 본인이 철저히 의도한 것이었다.

 


  그래, 베네딕트에게 있어서는 기껏 건넨 호의가 단 일 초의 망설임조차 없이 날 선 의심과 경계로 돌아오는 이 상황이 꽤나 기꺼웠다. 그렇기에 그 수상한 의중을 꼬집는 상대의 질문에도 그저 입꼬리를 올려 한층 더 짙어진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서, 제 오른손에 쥐어진 매끈한 와인병을 한 차례 가벼이 흔들 뿐이었다.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는 다름이 아니라, 오늘 밤 칼리안 에우페베카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안에 든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먹이고야 말겠다는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중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래, 저 단정한 얼굴이 취기로 잔뜩 흐트러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느긋하게 감상해보고 싶어져서라고 하자. 그 상태로 얼렁뚱땅 소파 위에 자빠트려 깊게 입을 맞춰버린다면 분명 뺨을 시원하게 얻어맞겠지.

  베네딕트는 그것도 제법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칼리안에게 넌 진짜로 천하의 빌어먹을 개자식이야, 라는 짓씹는 듯한 욕설을 들은 지도 좀 된 것 같고, 요새 들어 둘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온전히 평화로운 나날들만을 보냈더니 그게 약간 그리운 것도 같고.
 

  “무슨 속셈이긴. 오래간만에 ‘친구’끼리 술 한 잔 하자고 청하는 게 그리 이상할 일인가?”

 

  “누구랑 누구가 친구라고?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 베네딕트 에일나이트.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네 뻔뻔한 낯짝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니까.”

  “이거 섭섭하게 왜 이러시나. 7년간 단둘이서 한 기숙사 천장 아래 잠든 룸메이트 사이끼리. 난 널 생각해서 기껏 집안의 커다란 와인 창고를 뒤져 제일 귀하고 비싼 녀석을 골라 들고 왔는데.”

 

  “누가 그래 달라고나 했던가? 네 좋을 대로 멋대로 한 짓의 책임을 왜 내게 전가하려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7년씩이나 매일같이 얼굴 보고 살았으면 이미 질릴 만큼 충분히 보지 않았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애꿎은 사람 하나 찍어선 악취미적으로 괴롭히는 짓도 슬슬 그만 좀 하고. 나잇값 못하고 철없이 구는 것만큼 추한 짓거리도 더 없으니까.”

 

  “호오, 이거이거 설마… 주량이 와인 한두 잔 마시면 뻗어버릴 만큼 약해 내 앞에서 추태라도 부릴까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천하의 칼리안 에우페베카가 고작 술자리 따위에 쫄려서 꼬리 내리다니, 이런 흔치 않은 광경을 다 보게 되는구만.”

 

  “헛소리 그만하라고 했지. 애초에 술을 그리 즐기는 편도 아니지만 너와 이 밤중에 단둘이 대작한다니 생각만 해도 토기가 치밀어서 그래.”

 

 


  두 사람의 대화는 가면 갈수록 어린애들 기 싸움처럼 한도 끝도 없이 유치해질 뿐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또 베네딕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칼리안은 분한 듯 매섭게 눈을 흘겼고, 베네딕트는 자신이 뭘 어쨌기에 그러냐는 듯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방 주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한가운데 위치한 고급스런 소파 위에 적당한 쿠션감을 즐기며 슥 걸터앉아선, 이리 오라는 듯 까딱여진 손가락은 어이를 상실한 옅은 조소만을 불렀다. 칼리안은 하도 기가 차서 뭐라 말로 지적할 의지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이 관계는 늘 그랬다. 칼리안은 베네딕트와 함께 있을 때는 대개 그에게 뼛속까지 놀아나는 듯한 찝찝하고도 불쾌한 감각을 치우지 못했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서마저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그가 지치지도 않고서 흰 얼굴에 거죽처럼 두른 태연한 웃는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 아래 숨겨진 속셈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속이 답답했다. 일상적인 호흡이 버거워질 만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입 밖으로 토해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감정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사랑임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끔찍했다. 칼리안 에우페베카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장 끔찍했다. 누군가의 사랑은 달콤하고 보드라운 노랫소리가, 시구가 되어 심장에 스며드는데 어째서인지 사랑이란 건 제 근처에만 다가왔다 하면 순식간에 잔인한 칼날 뭉치가 되어 뱃속에 든 장기들을 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는 그저 사랑조차도 불공평했다.

 

  베네딕트는 사랑이란 단어는 모르는 남자였다. 예로부터 사랑 따위에는 일말의 흥미조차도 동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저를 향한 사랑이란 감정을 마주하면 들고야 마는 묘한 불쾌감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유독 저를 사랑한다는 이들에게 박했고, 잔인했다.

  베네딕트가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것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나날이 미쳐간 한 여자를 지척에서 지켜봤던 언젠가의 일이 미친 영향이 컸음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므로 칼리안 또한 그 사실을 몰랐다. 물론 알았더라도, 베네딕트가 칼리안에게 해온 그동안의 만행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해자의 사정이야 피해자 쪽에서 알 바가 아닐 테니까.

 


  그러나, 만약 알았더라면… 어쩌면, 칼리안은 지금 이 순간 베네딕트에게 입 맞추기를 잠시나마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찰나였다. 그가 베네딕트의 손에서 와인병을 휙 낚아채듯 뺏어들어선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고, 이어 멱살 틀어쥔 손이 그를 제게로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그대로 깊게 맞물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 가는 틈새로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창백하리만치 흰 살갗에 맺힌 짙은 적색의 대조가 선연했다. 포도주는 얼음처럼 찼지만 그것을 너머로 삼켜내자 알코올 때문에 관자놀이에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돌았다.

  베네딕트 에일나이트는 갑작스런 입맞춤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임기응변은 그의 주특기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그는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다. 키스의 주도권을 도로 찾아오는 것은 그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때로는 짓뭉개듯, 때로는 집어삼키듯, 때로는 물어뜯듯… 결코 결코 짧지 않은 동안 집요하게 맞물리고 얽히던 두 입술이 도로 떨어지자—

 


  “베네딕트, 아드리안, 에일나이트 넌 진짜로 천하의 빌어먹을 개자식이야.”

 

 

  가쁜 숨의 남자는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그래, 나도 이미 알고 있어. 친애하는 나의 칼.”

 

  또 다른 남자는 마치, 연인의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들은 이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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