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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밤
​솝떡 씀.

  3일 21시간 2분 14초 경과. 흙바닥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물 탓에 진흙을 이룬 바닥과 보통의 인류가 필요한 최소한의 조명, 진흙에 박힌 돌을 긁는 날 것의 소리-인간의 것으로 표현하자면 쇠사슬 소리일 것이다- 사이로 마족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에는 날이 선 식물로 인한 자상이 회복기를 거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마법 제어 능력이 담긴 두꺼운 장미 덩굴이 덮고 있어 발버둥 친다고 한들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내 말 이해 못 했어? 그 마도사가 알빈 페일럿이었다고."

 

  비교적 작은 입을 가진 수인으로서는 어디까지 입이 찢어질 수 있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마족은 크게 웃으며 로제를 향해 깊은 조소를 보냈다. 아픈 신음이 섞이고, 폐가 손상되기라도 한 듯 쇳소리가 엉긴 웃음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던 터라, 로제는 몸소 진흙을 밟아 마족에게로 걸어갔다. 로제의 손에 잡히는 은발의 머리카락은 물과 끈끈이에 젖어 잘라내지 않으면 앞으로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렴 온 세상이 전쟁통인 마당에 일상생활을 얼마나 영유할 수 있겠느냐마는. 머리카락을 꽉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자신보다 2배 정도의 덩치를 가진 마족을 일으키는 무게는 로제의 생각보다도 무거웠다.

 

  "웃지 마. 그리고 거짓말인 게 들통나면 네 심장을 꺼내 식충식물 안에 넣어버릴 거야."

 

  로제의 협박은 안타깝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족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로제가 잡아 뒤로 젖힌 마족의 얼굴은 본래의 잿빛 피부가 무색할 정도로 시커멓게 변질되어있었다. 불을 사용하는 마족에게 물고문을 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친애하는 동료가 실은 마왕의 편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나 본데."

 

  로제는 이죽거리는 마족의 얼굴을 다시 물속에 집어넣었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품과 소리 없이 으스러지는 호흡이 로제의 줄기를 타고 느껴졌다. 인신공격까지 하는 것을 보아 아직까진 살만한가 보지. 로제는 애써 올라오는 울컥한 감정을 억눌렀다. 알빈에 대한 로제의 감정은 저런 도발 섞인 어조로 담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친애라고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로제는 알빈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 알빈이 마왕의 아래에서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며 파괴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은 로제로서는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진실이었다. 로제는 그 당시 장미 덩굴 사이로 빛처럼 떨어진 하얀 깃털을 기억해냈다.

 

  로제의 가까이에 서 있던 수행원 한 명이 로제를 쳐다봤다. 로제는 용을 쓰고 고문을 해도 똑같은 정보만을 반복해 말하는 마족에게 이렇게 시간을 쏟을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타이밍을 놓쳐 고문 중 마족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도 그랬다. 물 위로 떠 오르던 기포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아 표면은 잔잔했다. 그제야 로제는 생각을 끊은 듯 물속에서 손을 빼냈다.

  "불에 태워."

 

  그러면 또 모르지. 다시 살아날지도. 자신의 실수를, 혹은 고의였을 지도 모르는 행위를 무마하는 말을 내뱉고 로제는 고문실 밖으로 나섰다. 식충식물의 안위를 위해서 굳이 심장을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약 460여 년을 살아온 로제에게 평화를 깨고 등장한 마왕은 눈엣가시였다. 마족들 사이에서 특출 난 능력과 빼어난 재능을 가져 보위에 올랐다는 마왕은 확실히 세계에 있는 13개의 아티팩트를 합친 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었다. 로제와 같은 수인과 상대적으로 평범한 휴먼에게는 형태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지만, 마족과 천족에게는 확실한 위계와 신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에서 위로, 오로지 마력과 힘을 통해 왕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런 자가 현재 세계의 보수적인 정치와 불공정한 경제에 불만을 품고 마족을 대동하여 세계 연합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니 영토는 잿더미가 되고 인간들-지배당한 영토의 모든 종족을 일컫는다.-은 세뇌되었으며 문화와 언어는 파괴되었다. 마왕은 이 전쟁을 일컬어 '창조적 파괴'라 칭하였고, 파괴한 것들은 모든 아티펙트를 손에 넣은 후에 회복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치유를 염두에 둔 파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아무리 마법적 힘을 동원한다 한들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과정에서 죽어버린 생명, 특히 식물, 어제 피었던 꽃과 그걸 본 순간의 감정 같은 것들. 마음속에 박힌 전쟁의 아픔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로제에게는 400여 년의 시간 동안 일구고 피워낸 거대한 정원이 그러했으며, 로제는 그 정원을 기반으로 세운 재력과 인맥은 결코 치유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힘자랑밖에 없는 어리숙한 마왕은 그러한 것들을 간과한 채 자신의 입맛대로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괘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현재의 세계 정황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마왕을 따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왕의 목적은 이해하나 수단을 용납할 수 없어 마왕에게 반대하는 이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마왕이 빼앗으려 기를 쓰는 13개의 아티펙트의 주인들이 마왕을 억누르기 위해 자처해서 모였다. 영웅이라 칭하기에는 마왕의 힘에 휩쓸리고 있니 사람들은 그들을 적당히 용사라고 불렀다. 물론 나서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공격이 최대의 방어라는 말이 있는 만큼 대부분 아티팩트를 빼앗기고 힘을 잃었다.

 

  알빈은 용사 중 한 명이었다. 로제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알빈은 특별했다. 제각기 고유한 능력을 지닌 아티펙트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그 아티펙트가 품고 있는 능력이 어떠한 능력인지 알지 못했다. 전해 내려오는 구전 설화 속에서도 13번째 아티펙트는 밝혀지지 않은 능력이긴 했으나 유독 마도사, 혹은 전사 등의 각기 능력자 사이에서도 가장 어려서 그런지 로제의 눈길에 밟혔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주제에 밤마다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닦아주러 찾아왔다는 것 또한 그가 신경 쓰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너무 울면 눈이 짓무른다는 등, 우는 얼굴이 보기 안쓰럽다는 등. 밤마다 우는 것은 장미수인인 로제가 단순히 햇빛을 못 받고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었는데도.


  그는 부러 로제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로제는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모든 신뢰와 존중 또한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날려 보낼 것이라 마음먹었다. 로제에게 전부인 것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는 로제의 정원밖에 없으니까. 로제의 고향, 아름다운 대륙의 장미꽃밭. 장미들은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고 오늘 피어 박동하는 꽃들은 어제의 호흡을 거쳐 나날이 달라지고 있으니, 로제는 그 생명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로제의 인생이었다. 비록 반파되었을지라도 말이다.

 

 

  내 아티팩트의 능력은 식물의 생장이야. 처음부터 식물의 자유의지를 제어할 순 없었지만 많은 식물을 피워낸 경험 덕분인지 성장에 관여해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어. 이 사실은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이 아티펙트를 사용해서 작은 낙원에 불과했던 로제의 정원을 크게 넓히고 관리할 수 있었고, 이 정원을 기반으로 각종 사업을 할 수 있었으니까. 공부 머리는 딱히 없었지만 어떻게 사업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어서, 나는 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꽃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서 사업을 확장했어.

  솔직히 이런 선한 바람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야. 야망이 없었다면 내가 이 나라의 경제에 영향을 줄 만큼의 대기업 회장이 될 수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까. 계급으로 따지면 천민 취급을 받는 수인이 뭘 생각했겠어? 사회개혁까지는 아니지만 수인도 뭔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내지는 꼭 너희들을 아래로 내려다봐 주겠다, 하는 오기 정도가 있었겠지.

 

  그래서 나도 딱히 세계의 흐름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 왕은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세금과는 별개로 내 장미와 희귀 꽃들을 가져갔고 관리도 제대로 안 해준 채로 순간만 즐기고 버리는 장식품 취급을 했어. 다른 나라들은 이 나라를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자원을 갈취해갔고, 그 과정에서 또다시 내 꽃들을 뿌리째 뽑아갔지. 아티펙트도 없으면서 기후에도 맞지 않는 꽃들을 가져간 거야.

  그 꽃들은 어떻게 됐겠어? 아마 이동 중에 빛도 보지 못한 채로 반은 죽었을 테고 나머지의 반은 피지도 못했을 테고, 또 그의 반은 벌레가 먹어버렸을 거야. 나에게서 가져간 꽃 중 오로지 몇 송이만이 제대로 도착해 귀빈들의 밥상 위에 장식용으로 올라갔겠지. 아니면 운이 좋게 결혼식 케이크 위에 올라가거나.

  그래, 정정할게. 세계의 흐름을 좋아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싫어했어. 이런 세상이면 멸망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나는 이 구조가 싫었어.


  그런데 나는 왜 마왕을 따르지 않았을까. 대기업 총수로 지내왔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건 아닌가 해. 내 꽃들이 망가지고 있었지만 나 자체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호사롭게 살고 있었으니까. 내가 키우는 꽃과 나를 비교했을 때 있는 차이점이라고는 나는 그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눈코 입이 있는 것, 그리고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르는 것, 마지막으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밖에 없는데 말이야.

  내 꽃들을 지키고 싶다는 것을 핑계로 내가 누리는 것들을 지키고 싶었을지도 몰라. 마왕은 이 세상을 선택적으로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니까.

  아, 아티펙트는 어떻게 가지게 되었냐고? 이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 내가 어느 날 할아버지의 정원에서 발견되었을 때 아티펙트와 함께 있었대.

 

  어쨌든, 그래서 나는 그날 정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어. 마왕이 가져가겠다고 예고한 아티팩트는 당연히 나한테 있을 테고, 나는 정원을 파괴당하기 싫었으니 그대로 성으로 간 거지. 맞아. 마왕은 내가 있는 곳을 공격할 테니까 그 전쟁터가 내 정원이 아니라 왕이 기거하는 성이 되길 바랐어. 주변의 민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꽃이 아닌 인간들까지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었으니까. 이건 다른 용사들에게는 비밀이야. 네가 비밀을 지켜줄지는 이젠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13개의 아티팩트 중에 9개나 빼앗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용사들은 어떻게든 나를 지켜줄 테고 나도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었어. 지킬 수 있기만 했나, 마왕을 밀어낼 생각도 했는데.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마왕의 작전이 내가 있는 성을 먼저 공격해서 나에게서 아티펙트를 빼앗은 뒤, 마을을 파괴하는 순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을 줄.

  그전까지는 그래 왔었잖아. 민간인을 인질로 삼고, 정의감에 찬 아티펙트의 주인을 자극한 다음에, 아티펙트를 빼앗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그 주인을 비탄에 빠트리는 순서. 지겹도록 반복된 서사였는데 말이야. 나한테는 그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어떻게 알았을까? 마왕의 수족들은 그렇게 사전 조사를 열심히 하는 타입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아, 이거 편견인가?

 

  그래서 말이지. 하늘에서 마족들이 내려와 무작정 땅에 메테오를 날리기 시작하는데, 정말 벙찔 수밖에 없더라.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게 다행일 정도로 모든 게 쑥대밭이 됐어. 내가 파괴되길 원했던 성에서부터, 그 주변에 있는 귀족들, 민가, 산, 들, 강, 모두 용암으로 덮이거나 불길에 휩싸이거나. 일부러 불속성 마도사들을 주로 보냈더라고.

  물론 이건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상극인 물속성 아티펙트를 지닌 용사가 고생을 좀 많이 했지. 일부러 댐을 터트려서 용암 위를 또다시 강으로 덮어 식히고, 구름 능력자를 한가득 불러와 비를 내리게 하고. 나는 일부러 물을 머금은 식물들을 함정처럼 설치해서 마족들을 잡기도 하고.


  그런데 웃기는 게, 어떤 멍청한 수도사가 나한테 말하는 거야. 네가 내 정원 쪽으로 갔다고. 그 말을 듣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뒤돌아보니까 네가 없더라. 그래서 이 상황에 왜 정원으로 갔냐고 화를 내니까 그 수도사가 말해주는 거야. 내가 너에게 선물해줬던 꽃잎을 두고 왔다 했다고, 상황이 위기에 봉착했으니 목숨을 잃어도 그건 갖고 있어야겠다고.

  그 몇 달 전부터 용사들을 전부 정원으로 초대해 내 저택에서 기거하면서 회의를 했었잖아. 마왕이 온다고 하기 전날 마지막 만찬이라며 내가 파티를 열었었고, 무도회장에서 너가 나한테 키스했고, 밤을 보냈고, 그때 꽃잎을 어디다가 빼먹었었겠지. 아무리 망가지지 않는 거라지만 그건 정말 가벼운 거였고, 정신없었으니까.

 

  내가 파티를 열지 않았다면, 마지막 만찬 따위를 하지 않았었더라면 넌 내 옆에 있었을까? 어떠한 형태로든 말이야. 어떻게든 마족들을 떨쳐내고 정원으로 갔을 땐 그나마 걸어놨던 결계는 파괴되었고, 한 마도사가 불타버린 장미정원에 서 있었어. 한 팔에는 반쪽 날개만을 지닌 너를 들고, 나를 쳐다봤어. 아티펙트를 순순히 내놓는다면 너를 준다고 하더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 네 날개는 이미 반쪽이 없어져 있었는걸. 얌전히 돌려준다는 게 웃기는 이야기지. 게다가 너도 아티펙트의 주인이잖아.

 

  그런데 진짜 웃겼던 게, 정원은 이미 불타 있었으니까 마왕을 처치한 다음에 재건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야 했는데, 그냥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 나한테 없다고 말이야. 대신 당신이 말하는 무엇이든 할 테니까, 너를 돌려달라고. 그랬더니 마도사가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했어. 그리고 그대로 너를 데리고 사라졌어.

 

 

  오늘은 마왕과의 접견 일이었다. 세계의 왕들과 귀족들은 중요한 협상의 자리에서 자신의 입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조건들을 내걸었다. 몇백 년의 기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공납, 혹은 속국이 되겠다는 조약 등 백성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남아있는 귀족들을 위한 계약서였다. 세뇌당하지 않은 백성으로부터 많은 원성을 사고 억압해 눌러내어 생각해낸 것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접견 당일, 그 조약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작 마왕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주제에 접견 자리를 마련한 것도 마왕이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접견인지 모를 일이었다. 마왕은 본래도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그의 대리인을 자리에 앉힐 거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그것 또한 아니었다. 접견 장소에는 마왕 측이 잡아가 두었던 인질들이 있었고, 그들이 가족과 상봉하는 시간을 갖게 했다.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파괴를 일삼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었다. 왕국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접견 장소에 나간 로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두 눈으로 본 사실만을 말하자면 알빈은 인질이었으니, 당연히 로제의 눈앞에는 알빈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겉은 멀끔하게 새 옷을 입고 나왔으나 이곳저곳에 남은 상처들은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어딘가 아파 보이는 기색이었다. 평소 날개를 접고 다니는 동안 평범한 휴먼의 등처럼 깨끗해야 하는 그의 등은 한쪽이 붕대로 감겨있었다. 날개를 뜯겼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잘 있었는지 모르겠어."

 

  만일 로제가 잡아 가두었던 마족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저 잘 있었을 테지만. 로제의 눈에는 그저 반쪽 날개를 잃은 천족으로 보였기 때문에 가슴이 아릿해져 오기까지 했다. 어떻든 그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만약 그가 겉모습으로 제게 동정표를 사려고 했다면 성공이었다.

 

  "마왕이 하루의 시간을 주었어요. 울지 말아요, 로제. 짧은 시간이지만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와중에 오늘은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그는 서슴없이 내뱉었다. 로제는 눈물 대신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지금은 황혼이니까. 재회의 눈물을 대신해 웃음을 뱉을 정도의 정신력은 있었다.

 

 

  "함께 식사하러 갈까요? 이곳은 마법적 공간이라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도 각자의 방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아마 저녁 식사를 부탁하면 그것도 준비해줄 거예요. 당신에게는 식사 대신, 마실 수 있는 걸 드려야 하지만."

 

  로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쓸었다. 부드러운 피부에는 약간의 식은땀이 있어 보였고, 그 탓에 앞머리가 조금 젖어있었다. 긴장을 한 걸까, 이곳으로 오는 과정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등의 상처가 아직도 아픈 걸까. 창백한 뺨을 매만져보며 그의 제비꽃색 눈망울을 마주했다.

 

  "배고파?"

 

  알빈은 로제의 물음에 그저 웃었다.

 

  그렇게 둘은 단둘만의 공간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로제는 그와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이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알빈이 잡혀가기 전까지 자신이 보아 온 것들을 그리고 어느덧 황혼이 지나갔다. 네가 사라졌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맺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식사를 위한 음식들이 나오고 곁들일 적포도주가 나왔을 때도 한참 눈물은 멈추지 못했다. 알빈이 손수건을 꺼내어 로제의 눈물을 닦아주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로제는 손을 뻗어 저지했다. 자신이 진정해볼 테니 계속 앉아있어 달라고 로제는 부탁했다.

 

  "그래서 그 마도사의 수하로 보였던 마족을 잡아서 물어봤어. 너가 어디로 잡혀간 건지."

  수하라고 하기에는 충성심이라는 게 부족해 보였긴 했지만. 로제는 적포도주를 손에 들었다. 투명한 물이 아니면 꽃잎 끝이 시들해지는 성향이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리고 로제는 손끝에서 그의 잔과 자신의 잔 위에 꽃잎을 뿌렸다. 

 

  "내 아티팩트를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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