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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결 씀.

거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는 교회 안까지 침범하려는 듯 웅장한 소리를 내었으며 프시케는 그것이 마치 망자를 위한 장송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뚫을 기세로 퍼부어 대는 것을 보니 무던하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나 보다. 칠흑같이 검은 면사포 아래로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오늘 같은 날, 허리까지 오는 면사포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옆자리에서는 관에 담긴 이를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오래전에 숨통이 끊긴 자는 기도 따위 듣지 못할 텐데. 못된 버릇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프시케는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다란 손가락을 겹쳐 올렸다. 그 손길은 누군가의 숨통을 천천히 죄듯 느린 속도로 이어졌으며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 가장 모독적인 행동이었다.

 

아, 만일 내가 죽었었더라면.

 

자기 목덜미를 한껏 움켜쥐는 것은 짧은 상념이었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했다면 구슬 같은 눈물을 흘려줄 이는 몇이나 될까. 손가락에 꼽을 만한 숫자가 입속에서 퍼졌다. 자신을 낳아 기른 부모, 그리고 몇 안 되는 혈연관계로 모인 이들. 적어도 앞에서 눈물을 흘려줄 이는 몇 존재했다. 그게 허구의 농도일지라도. 교회에 모인 이들에 비해 확연하게도 적인 숫자였지만 프시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려 달큰한 상상은 줄곧 이어졌다. 

 

 

 

 

 

오멸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도 식은 느릿하게 진행되어 갔다. 중앙 통로를 가로지르는 인파는 그야말로 눈물의 향연이었다. 뉜 사해 앞에서 애곡하며 이름을 부르짖는 것은 기본이요, 그의 불귀를 용납할 수 없다고 외치는 자들 또한 존재했다. 프시케는 소음에 진득하게 얽혀있던 손가락을 풀어낸 후 앞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면사포 속으로 풍기듯 밀려 들어오는 향의 찾기 위함이었다. 프시케는 이 향의 정체를 알았다. 흡사 핏물처럼 붉디붉은 색채를 갖고 있으며 첫맛은 쌉쌀하기 그지없으나 음미할수록 점차 달짝지근한 맛을 선사하는 그것. 

 

프시케는 가벼이 시선을 인파 너머로 꽂았다. 그는 쉽게 향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에녹 조슈아 그리즐. 

 

검은빛 수트를 걸친 그는 정갈한 자세로 관 옆에 서서 목을 빳빳하게 든 채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와인잔을 든 시종이 하나 서 있었다. 상주, 에녹은 자신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와는 가문 간의 유대를 위한 자리에서 만났었다. 서로는 인생의 반나절 이상의 세월을 알고 지낸 셈이 되었다. 그가 아내를 맞이하기 전까지만 해도 에녹의 옆자리는 늘 프시케, 자신의 자리였음은 이 자리에 모인 누구든 아는 사실이었다. 

 

프시케는 오랜만에 마주한 그 얼굴이 반가웠다. 그렇지만 마음껏 반가워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에녹은 부인과 영원을 약속한 이후에 둘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이가 되었다. 그가 부인의 건강을 위하여 영국 외곽으로 거처를 옮긴 탓이 컸다. 사람들은 그를 가정에 충실한 이와 동시에 애처가라고 불렀다. 비록 사랑으로 맺어진 연이 아니었어도. 이 바닥에서 그런 결혼이야 닳도록 흔한 일이었다. 프시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부인을 끔찍하게 아꼈을 것이라고. 

 

 

 

 

 

 

 

 

그러나 비추어진 얼굴은 제 생각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부인을 여의고 비탄에 잠겨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그의 낯은 말끔하다 못해 슬픔을 담아낸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운명에, 팔자에 수긍하듯이 목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간혹 그를 향한 조문객의 인사에만 반응하는 수준인 응대. 그는 관 옆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눈길을 주거나,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동작 따위는 없었다. 꼭 의무감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처럼. 

 

프시케는 눈을 깜빡거렸다. 부모가 쥐여 준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서 인파 사이에 섞여 그 중심에서 몸을 맡겼다. 뒤에서 일렁이는 말소리는 유독 크게 들려만 왔다. 순진한 자들은 허울 좋은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가령, 이런 것들. 

 

 

 

"저런. 부인을 잃은 슬픔이 큰 모양입니다."

"그럼요, 서로 끔찍이 아끼는 사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온몸이 굳으셨네요. 웃음을 잃으신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전부 틀렸다. 프시케는 에녹을 오래 알고 지냈다. 그의 감정 한 올 따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장에 그의 행동은 비애에 젖은 태도가 아니었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저 태연함은 이야기가 종막에 이르렀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프시케는 당혹스러움에 빠졌다. 동시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어가던 마음이, 온기가 돌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포기해야 하던 것들이 있었다. 에녹의 옆자리에는 늘 자신이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던 과거가 있었다. 집안 사이가 뛰어나게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의 이해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당신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당신 또한 그러리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해피엔딩 그 자체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모두 깨져 버리고 말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에녹의 선택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은 불청객이 되어 있었다. 프시케는 주변을 하나씩 제치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서는 발길이 바닥을 크게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깨진 것들을 이어 붙여 완성시킬 수 있다면. 찢어버린 뒷이야기가 존재한다면. 

 

프시케는 온전히 그의 앞에 섰다. 무표정한 낯빛의 에녹이 자신을 마주 보았다. 여러 고뇌를 품은 미소가 짙게 번졌다. 오늘 같은 날, 허리까지 오는 면사포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를 마주한 프시케는 무어라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디 와인잔을 붉은 탐욕으로 채워주기를 바라면서. 

 

"잠시, 실례할게요." 

눈앞에서 투명한 잔에 붉은 핏물 같은 액체가 쏟아졌다. 모습을 지켜보던 프시케의 하얀 손길은 시종이 들고 있던 잔은 그러쥐었다. 그리곤 에녹에게 건네 졌다. 자신과 비슷한 농도의 고독을 지닐 그대를 위하여. 망자는 그저 하늘에서 모든 것을 내려 보며 편히 쉬소서. 이는 명백한 기만이 담긴 기도였다. 아, 만일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면 그때에는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감을 담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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