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늘에도 마른 포도넝쿨 얽히매
에본 씀.
일부 고어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1.
질척하고 불그스레한 길. 한 발 뗄 때마다 진득하게 밑창에 들러붙는 점성질. 갈수록 짙어질 뿐 끝없는 칠흑의 농도. 눈을 뜨고 있어도 눈 앞의 것 분간할 수 없으니 차라리 감는 게 나을지 몰라. 눈 뜬 자의 시력은 갈수록 퇴화한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어둠에 먹혀버리기 위하여. 손 뻗어 휘저어도 스칠 것 하나 없는 허공 속을 걷는다. 마비된 후각. 불길한 색. 거꾸로 걷는 길.
2.
알빈 페일럿은 눈을 감는다. 깊숙하게 등을 묻을 수 있는 푹신하고 커다란 소파였다. 입에 문 담배로부터 자욱하게 연기 흐른다. 방 너머의 숨죽인 속삭임을 듣는다.
“저 자는 그럼 언제부터 우리의 스파이였던 거야?”
“글쎄, 모르지. 우리 정도면 꽤 높은 직책인데도 전혀 언질조차 못 들을 정도였다면…”
“확실한 건 마왕님과는 상당한 친분이…”
그러다 부자연스럽게 뚝, 소리 끊긴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지루하다는 듯, 몸을 소파에 조금 더 파묻고 다리를 꼬았다. 새로운 개비를 문다. 가벼운 불씨 정도는 무언마법으로 충분히 불러낼 수 있다. 그는 촉망받는 마도사였으니까.
“눈 뜨지 않는군.”
상대의 목소리를 담배연에 괴어 흘린다. 검고 낮은 웃음 소리도. 숨 내뱉듯 옅게 답한다.
“어차피… 익숙한 면면이지 않나. 굳이 새삼 볼 이유라도.”
“그도 그렇지.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거 따지지 않나?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서로의 세상을 본다, 그런 말… 인간들의 격언이잖나.”
“지금은 딱히. 당신과 나누고 싶은 세상은 아니지.”
불꽃이 얇은 막대를 태우는 것처럼, 목 안쪽이 타들어가듯 마른다. 지겹다.
“거기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도 지금 눈 감고 있잖아…”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 상대방의 허무한 웃음소리에 겹겹이 쌓인 것이 절망임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것이.
“그도 그렇지.”
이번에도 마족들의 왕은 몹시도 즐겁다는 양, 흐느끼듯 웃었다.
“여전히 마주하고 싶은 세상이 아니니까.”
3.
그의 아티팩트는 금속제 장식품이었다. 출처도 기원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고, 본디 그리 값진 은을 쓰지 않아 딱히 눈에 걸리지도 않고, 약간 멋 부리고픈 청년이 적당히 걸고 있을 법한… 작은 역십자가 목걸이였다.
그는 그것을 자신을 반쯤 버리듯 방치한 친모로부터 받았다. 하늘의 천족은 제 아이를 지상에 내맡길 적 제 가문의 보물도 같이 내맡겼다. 그는 목걸이가 저와 같이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신의 선택을 받아 흰 날개를 단 뒤 늘상 고고한 그들은 쉬이 과거를 후회하거나 뒤도는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아티팩트는 힘 부여받은 뒤로도 거의 쓰일 일이 없고, 하여 인간의 역사로 형용된 적 없었음이다. 인간의 손에 자라 인간과 같이 자라난 그만이, 마치 인간인 양, 아티팩트의 주인이 되었다.
언제라도 제 어미가 저를 돌아봐줄까, 망연히 올려다보며, 애정을 갈구하면서, 미련과 인내를 요람 삼아 깃을 골랐던 그만이 그러므로 어긋났다. 그는 뒤돌지 않고 훌쩍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지상의 생물처럼, 특히나 땅 밑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꼼짝도 하지 않을 식물처럼 어딘가에 종속되고 묶여 안정하기를 바랐다.
그의 운명은
그런데도
흰 날개가 죄 꺾일 때까지 비행하는 새.
4.
정말로 아무것도 모를 적, 그는 마왕의 위협으로부터 흔들리는 세계를 지키기 위한단 명목으로 아티팩트의 주인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를 치른 바 있었다. 뷔에르라는 성씨를 새로이 내세우기도 했다. 뉘는 그를 새로운 성자로 불렀으며, 용사라고도 하였고, 또한 구원자라고 명명했다. 그는 살면서 그토록 많은 관심과 시선, 기대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가장 그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건 세례의 마지막, 한 잔의 포도주를 건네주며 웃던 어느 사제의 비스듬한 입매였다. 그가 말했다.
포도는 신의 뜻 받드는 자들의 피를 뜻하니.
포도나무는 곧 당신들의 상징이랍니다.
세계의 뜻을 삼키세요, 그대.
5.
그리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 모든 아티팩트의 주인이 숨 거두고 못내 사랑하게 된 작은 연인이 제 품 안에서 낙화하고야 말았을 때. 그 날 그의 마지막 기억도 상대방의 비스듬히 웃는 입매였다. 손수 그의 날개 한쪽을 부러뜨린 그가, 언제나의 적이자 새로운 동료가 될 그가 말했다.
이제 그대도 이 세상을 부정할 마음이 들었겠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픈 마음도.
세계의 뜻에 반항하라, 그대.
6.
포도는 신이 내려준 선물. 그러나 오, 포도를 빚어 한 병의 술로 만드는 재주는 오로지 악마가 인간에게 가르친 것이라.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은 신의 힘을 빌어 포도주를 빚나니.
멸망을 새로운 순리로 삼은 세계에서 그는 시간을 돌렸다.
7.
세계의 생명 죄 죽여 섞은 피를 비료로 삼아 땅을 적신다. 처음에는 얌전히 슬퍼하느라 온 힘을 썼고, 중반에는 각오를 벼리며 단단해졌고, 갈수록 더러워지고 피폐해졌으며, 이제는 고인 감정을 흘려내기 바쁘다.
눈을 감아도 과거의 기억이 망막에 맺힌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청각은 미래의 소리까지 붙잡아 들었다. 환영임을 알아도 고달프고, 어차피 무의미한 기억들임을 알아도 곤하다.
어떤 때에 세 여인이 광소를 터트리며 춤을 춘다. 그 아래에 깔린 것은 터져나간 가죽들. 돌처럼 굳은 자들의 눈에는 피가 흘러내린다. 검게 썩은 혈육의 내장을 제 손으로 터트린 남자가 운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한 영혼으로 묶이자며 고개를 떨구고 입을 벌린다. 들판에는 괴이가 야합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태해진 사제들은 아무리 등과 팔을 두드려도 그저 평안히 미소하며 죽었다. 모든 꽃이 썩는 그때에, 그는 그만두려는 결심을 다시 그만두었다.
이제 그는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
몇 번을 더 시간을 돌려야할지, 몇 번을 더 제물을 바쳐야 세계가 만족할지, 시간을 돌리는 그들조차 몰랐다. 일시에 모두의 피를 집어삼켜 폐허만이 남아야 할 자리. 일부를 자주, 꾸준히, 누적하여 제물로 내세웠다. 영혼이 많이 메마른 그는 이제 한 번의 시간을 되돌릴 적 또 다른 아티팩트 몇 개씩의 힘을 덧댄다. 처음에는 모든 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눈물로 설득하고 포옹으로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도 늘 새로운 헛것이 된다. 그늘은 짙다.
이제 그는 하나의 꽃만을 여전히 사랑한다.
8.
바짝 말라가는 세계 속에서도 당신만은 나의 고정축. 나는 당신의 환한 생명을 타고 감아 한들거리지. 당신이 식물을, 자연을,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알아. 몇 번이나, 몇십 번이나 당신이 미처 자각하지 못한 진심까지도 보아왔지. 당신은 나를 사랑해. 당신은 그리고 이 세계를 사랑해. 나는 그런 당신을, 눈물겹게, 사랑해…….
나의 그늘에도 아직 자라나는 게 있어.
아직 우리의 사랑은 얽히고 자라.
9.
마왕은 연회를 베풀었다. 마왕과 알빈은 알았다. 이는 실패연이었다.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한 장대한 장례식이었다. 마왕의 숨이 조금 더 일찍 끊긴 것을 알빈은 보지 않고도 또 알았다.
“미안해요, 로제. 말씀하신 바를 들어줄 수가 없어요. 그건 우리를 위해 이미 쓰였거든요.”
술잔에 일렁이는 그림자 속 시간이 녹아있다. 은을 녹여 꽃잎을 말려 포도와 증류한 것. 지친 새가 또다시 흘러들러갈 세계.
“단 하루라도 행복했어요. 이게 이번의 세계가 저를 위해 베풀어주는 마지막 성찬이라도, 좋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사랑한 기억만은 내가 기억하므로 결코 헛것이 되지 않아.
잔을 들어 말해요, 다시 만나요, 내 사랑.
“많이 사랑해요.”
그대로 취한다.
광증은 오지 않는다.
사랑만이 온다.
이번 당신 품 속에서 낙화하는 것은 나.
하지만 괜찮아.
정말로 나는 괜찮아요…
10.
우리는 다시 한 번 얽혀들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