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하나뿐인 빛에게.
쪼암 씀.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툭, 투둑… 물방울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에 시선을 창 바깥으로 옮겼다. 먹구름 탓인지 삽시간에 어두워진 도시와 더불어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빛이 제 시야를 앗아간다. 습하고 불쾌하게 들러붙는 공기와는 다르게 제법 나쁘지 않은 광경이다. 그 화려함에 취해 바깥을 보고 있자면, 선연한 붉은색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익숙한 모습으로 뒤바뀌어간다.
아주 좁은 틈 하나만을 내비쳐도 순식간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 야금야금 사념을 먹어치워, 남는 것이라곤 오로지 하나밖에 없게 되는 것. 생각의 주인과도 닮은 그 행태에 괜스레 웃음이 나, 그득그득 제 안에 차오르는 생각을 마다하지 않았다. 불어나는 욕심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법이다. 특히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꺼운 감정 탓일까. 문득 치민 과거의 조각에게마저 몹시 관대해진다.
엔도 히카루는 사랑받고 싶었다.
어머니는 다정했으나 바빴고, 자식보다는 일이 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그것을 깨달았고, 이해했다. 투정을 부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고 그만큼 무지하지도 않았다. 또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포기하려 드는 머저리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제법 똑똑하게 굴 줄 알았기에, 제게 사랑을 채워줄 타깃을 혈육이 아닌 타인에게로 돌렸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해 사랑을 갈구했다. 다행히도 호감을 사기 좋은 개성과, 빼어난 외모 덕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때 채워지지 못한 사랑은 애정의 형태를 몹시도 뒤틀어버렸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기 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심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으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그 시커멓고 진득한 감정의 덩어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서 모든 관심과 애정을 집어삼키는 주제에 만족할 줄을 몰랐다. 스펀지마냥 모든 감정을 빨아들이고도 메말라하는 그것이 가끔은 벅차고 힘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받기를 포기하고 싶었냐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왜 그래야 하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엇나가 있는 것이라면 남을 제게 맞추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머지않아 제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이 제게만 의지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기쁜 일이었고, 거짓된 구원에 기대는 이들을 감싸 안는 것에는 희열마저 느껴졌다. 아, 그래. 그렇구나.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법이구나. 잇따르는 미움이나 증오 정도는 문제될 것도 없었다. 살면서 이토록 만족스러운 기분을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탓이다.
느지막이 만난 너는 제법 다른 양상이었다. 특히 스물여섯의 네가 그러했다. 반평생 거짓 구원자로 살아왔던 새는 추락했고, 떨어진 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을 휘두를 줄만 알았던 인생이 역전된 것이다. 휘어잡았다 여기면 말려들고 있고, 올려다본다고 생각하면 내려다보고 있고.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은 관계.
모든 것이 무너진 제게 있어서 네 회유는 제법 달게 느껴졌다. 선악과를 앞에 두고 뱀의 유혹을 받는 이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혹은 신에게 상자를 선물 받은 판도라가 그러했을까. 베어 물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향취. 닿아야만 할 것 같은 타는 듯한 욕구. 너는 정말로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온 악마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적도 많았다.
그리고 진실로 네가 악마라면 나로서는 이길 수가 없었지. 유혹에 매번 지고 마는 것이 인간 아닌가.
쌓아온 모든 것을 등지고 네 손을 잡기까지 저렇게 무수한 고민을 스쳤으나, 아마도 겉으로 보기엔 찰나의 순간과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분명 세간에선 제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 터다. 엔도 히카루가 카미하츠 루시를 택했을 때,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상엔 생각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은 법이다. 너와의 만남을 한순간의 불장난으로만 여겼지, 이다지도 진심이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자신처럼.
내게는 없는 선명한 색이 나를 휘어잡았다. 시야에 아로새겨지듯 선연한 붉은 네 머리카락이, 제 것과는 다른 짙은 보랏빛 시야에 희끗한 제가 담겨 너울거릴 때마다 알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그 눈동자는 짙은 소유욕을 머금고 저를 찬찬히 살피곤 했는데, 처참하게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짓밟았던 것에 비해 몹시 향기롭게 피어올랐다. 자꾸만 자신을 젖어들게 만드는 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독성이 강한 독이고 마약 같았다.
완전히 함락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 것과도 같은 진득한 감정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럴 의지조차 없었기 때문에.
차츰 기울어져가는 마음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 기뻤냐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제가 살아온 방식을 안다. 원하는 것을 살짝만 내어준 뒤 손아귀에 올리고 원하는 대로 주무른다. 갈망할 때마다 원하는 것을 조금씩 내어주어 포기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러니까 마음을 전부 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엔도 히카루는 욕심이 많았고, 또 남의 일부만 차지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네가 항상 갈증나.
내가 안달하는 만큼, 너도 나를 안달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일그러진 사랑의 형태에 너는 꼭 맞는 사람이었다.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를 항상 탐내고 또 불안해하고……. 내가 이렇게 자라온 것은 어쩌면 너를 만나기 위함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함께 있으면 자신도 멀쩡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망가진 날개도, 타인에게서 받는 선망과 사랑도 필요 없을 만큼. 또 딱 그만큼 네가 없는 내 삶이 겁났다. 이토록 짙게 물든 너를 내 삶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이해할 수 없어도 좋았다. 이해받고자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폭로되어 제가 짊어진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괜찮았다. 제 시커먼 욕망에조차 기껍게 빠져드는 사랑스러운 이를 어떻게 놓을 수 있겠는가.
이토록 달큰한 감정이 몸을 휩싼다. 적붉은 포도주를 따라내어 내민다. 제가 내민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독배일 것이다. 자신에게, 그리고 너에게. 짙은 눈빛이 이미 얽혀,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색채를 뿜어내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 관계. 그럼에도 이 잔을 마다하지 않는 뜨거움. 잔을 건네고, 눈빛이 스치면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사랑이 목을 타고 흐른다. 그 누구보다도 달콤한 맛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