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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이니라
오리오루 씀.

[트리거 : 상해]

 

  있잖니, 이든. 

 

  너는 언제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전부 이해한다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 그러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 또한 이해할 수 있겠니? 너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고 있을까? 삶에의 희망이 퇴색되고 죽은 사람만이 선명할 때 말이야. 죽음은 너무 밝고 삶은 너무 어두울 때. 모래가 떨어지는 통로는 바늘 구멍만한데 내 몫의 모래시계가 다 내려와야 비로소 네게 이를 수 있다니. 흘러가는 시간은 영겁 같고, 내 모래와 생은 너무 많이 남아있구나. …그런 식으로 웃지는 마렴. 나도 알아, 내가 너를 따라 죽어버릴 위인은 못되는 거. 그래도 네가 있는 죽음이 내 텅 빈 삶보다야 빛나 보이는 걸 어쩌겠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고 우울해져. 지금도 봐, 이렇게 네가 떠난 날만 돌아오면 다시 너를 보잖니. 

 

  아, 이든. 잔이 비었구나. 눈치도 없이 내 얘기만 했지? 여자는 제 앞에 놓인 잔과 남자 앞에 놓인 잔 모두를 홀로 채운다. 그리고 나서는 잔을 채우기 전처럼 다시금 아무래도 좋을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어제의 일과와 오늘 마신 차의 향, 인상깊은 대본의 각주와 같은 것들.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아있다. 경청하듯 여자의 눈을 들여보다가도, 종종 지루한 낯으로 테이블 끝을 두드리면서. 여자는 굴하지 않고 과거의 이야기들도 몇 편 꺼내어 놓는다. 두려워 하는 것은 제가 입을 다물면 내려앉을 정적인가, 혹은 눈을 돌리면 사라져버릴 환영인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여자는 말을 멈추지 않고 목소리 끝이 갈라질 때마다 포도주로 입을 축인다. 제 잔으로는 모자라 남자의 잔에 들어찬 슬픔까지 모두 마셔버린다. 직후 말한다. 아, 이든. 잔이 비었구나.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눈치도 없이. 그런데 그 얘기했나? 어제 봤던 대본에서, 아니, 오늘 마셨던……. 벌써 몇번째나 두 개의 잔을 채우는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려온다. 그런가 싶으면 일순 여자가 놓친 포도주병이 식탁 위를 구른다. 검붉은 액이 식탁보 위로, 나아가 탁자의 주름으로 스몄으나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잘게 떨며 숨죽인다. 가끔은 내가 미친 것 같아. 일에 파묻혀 살다가도 네 목소리를 들어. 잘자다가도 발작하듯 일어나 서랍 속의 네 안경이 그대로인지 확인해. 네 기일마다 잔을 두 개 꺼내놓고는 전부 혼자 비워. 그러니까 부디… 방법을 알려주렴. 죽음은 너무 밝고 삶은 너무 어두워, 이든. 죽고 싶지는 않지만, 너는 보고 싶어.

 

  방 안을 겨우 밝히던 조명이 꺼진다. 굳게 잠궈두었던 창문이 열려 바람이 몰아치고, 커튼이 유령처럼 흩날린다. 바깥에서 누군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선명했으나 두 남녀는 평온했다. 그야 행복해지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니 죄책 같은 것은 잊기로 하지 않았는가. 비틀린 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며, 먹지 말라 이른 열매는 죄 입에 넣어가며. 그러다 맞이한 결말을 앓으니 삶보다야 죽음이 쉽고 찬란해 보이는 것은 카르마였다. 마침내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운명. 남자는 답을 아는 표정으로 나이프를 집어든다. 늘 한 발 앞서 걷던 이는 그였으므로, 이번에도 당신에게 답을 주고자.

 

  이윽고 집어든 나이프로 제 손바닥에 십자가를 긋는다. 적붉은 피를 채운 잔을 식탁 위로 내밀며 말없이 여자를 응시한다. 불결한 빛깔의 액체가 불온한 분위기로 찰랑인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여자는 남자의 죽음 이래 처음으로 그가 채워준 잔을 받아든다. 그리고 남자가 할 말을 스스로 상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목소리의 터럭이라도 들을 수 없을 것을 알았으니까. 여자의 상상 안에서 남자가 입을 뗀다. 마시라. 이것은 나의 피이니라. 이것은 구원도, 저주도, 비밀도 아닌 죗값이니라. 나는 죽음을, 너는 삶을 벌로 받았으니 십자가를 대신 지어줄 이는 이 땅에는 없느니라. 일라리아, 나의 불변할 친우… 우리는 서로의 부재를 등에 지고 모래시계가 멈출 때까지 괴로워하리라. 그 목소리는 남자 생전의 것은 아니고, 신의 것은 더더욱 아니며, 뱀의 언어처럼 텅 빈 바람소리에 가까웠다. 이든, 네가 맞구나. 

 

  여자는 눈물을 그치고 마지막 잔을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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