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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世
언젠가 햄뜰날 온다!
@ORU_CornerShop님 커미션.

 

  성적표를 내려다보며 마주 댄 머리통 두 개. 잠깐의 정적, 그리고 두 앳된 얼굴들은 서로를 향해 환하게 빛난다. 이변은 없었다. 원하던 대학과 원하는 학과. 무엇보다, 또다시 같은 곳. 바라는 바를 이루어낸 낯빛에는 후련함과 기쁨,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이 깃든다. 

 

 

 

  오늘이지? 그래, 오늘이야. 모든 결과를 확인하고나면 훌쩍 떠나기로 했으니까. 둘로서는 드물게 충동적으로 텅 빈 손으로 버스에 오른다. 물론 소년은 반대했으나 소녀는 단호했다. 넌 인생을 너무 재미없게 살고 있어! 충동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알지, 서이든? 오늘 같은 날은 그 단어를 좀 배워볼 필요가 있는 거야. 대개 서로에게 '져주는' 사이이니, 소년이 어쩔 수 없다는 웃음으로 그 대책 없는 여정에 동참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버스 노선도도 못 보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즈음에는 이미 종점에 둘을 내려준 버스가 매정하게 떠난 뒤였다. 연고 없는, 버스 정류장의 이름마저 페인트가 다 바래 읽히지 않는 바닷가 마을. 낮이라면 파도와 윤슬에 조금쯤 벅찰지 몰랐으나 이미 몇 번이나 갈아탄 버스 탓에 해가 저문 뒤였다. 그 황량하고 쌀쌀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소년이 입을 다문다. 소녀 역시 바닷바람에 제 팔을 문지르다 말없이 허리에 묶어둔 겉옷을 도로 걸쳤다. 

 

 

 

"…."

"…."

"…너무 배고파."

"…어, 나도."

 

 

 

  어설프게 민박을 예약하고 인근을 이잡듯 뒤졌으나 열린 식당을 찾지는 못했다. 애초에 관광지로 있는 마을이 아닌지 해변조차 해수욕장이라기보다는 말그대로 바다와 땅이 만나는 지점에 가까웠다. 흩어진 부포와 거친 모래만이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배경. 문득 몰려오는 여독과 허기에 소년은 그 모래 위로 털썩 주저앉는다.

 

 

 

  춥고 배고프네……. 일차원적인 생각을 흐트러뜨린 소년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해가 거의 사라져 어슴프레한 하늘과 끝 모를 바다가 맞닿아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공식과 불안들이 파도에 휩쓸려 마음은 가라앉았다. 속이 비니 오히려 정신은 맑았다. 인기척이 인다.

 

 

 

"청승 다 떨었어?"

 

 

 

  옆을 보니 소녀가 자랑스레 손에 들린 검은 비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즉석 조리식품과 군것질거리들이 연이어 나왔고, 이어 대단한 것처럼 마지막으로 딸려나온 것은 이름 모를 병이었다. 길쭉한 입구와 낯선 언어가 쓰인 라벨, 조잡한 코르크로 짐작하건대 편의점 와인이 분명했다. 

 

 

 

"그런 거 먹으면 머리만 아파."

"고맙다고? 별말씀을. 열린 편의점이 있어서 다행이야."

"…."

"종이컵 괜찮지?"

 

 

 

  하고는 보랏빛이 감도는 액체를 한 컵 가득 부어 내민다. 달짝지근한 알코올 냄새가 훅 풍겨왔다. 첫 음주를 이런 식으로 경험할 줄은 몰랐으나 소년은 순순히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소녀가 제 몫의 컵을 내밀며 건배? 하고 물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에는 묘한 생기가 돌았다.

 

 

 

  종이컵 두 개가 부딪혀봤자 맥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일뿐이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그를 바닥까지 비워내고는 인상을 찡그린다. …맛없네! 응, 그럴거 같았어. 그리고는 연이어 몇 잔을 더 마신다. 바닷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찼다. 때문에 식도를 타고 따끈해지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으므로 소년은 토를 다는 대신 얌전히 제 컵을 내밀었다. 소녀는 소리내어 웃으며 그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다시금 이는 정적은 오히려 평화롭고 편안하다. 둘은 한참을 멍하니 그대로 앉아있었다. 

 

 

 

  있잖아, 이든.

 

 

 

  어른이 되면 세상이 달라질 줄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이란 것도 쳐보고, 끝이 없을 것 같던 달리기에서도 결승선을 지났는데…. 여전히 도착하지는 못한 기분이야. 앞으로도 계속 달려야 할 것 같은 기분. 앞으로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응, 리아. 소년은 그 답지 않은 독백을 비웃는 대신 손에 들린 것을 한 번 더 홀짝이고는 천천히 입을 뗀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살아간다는 건 순간순간의 목표라면 몰라도 도착점 따위는 없는 거니까. 어떤 사람들은 삶 자체를 벌이라 여기기도 하고. 죄인의 삶이지. 살아가는 게 고행인 사람들의 삶. 삶은 너무 어둡고 죽음은 너무 밝은 사람들의. 하지만 봐. 우리의 삶은 죽음보다 밝을 거야. 우리는 아직 무고하고, 그렇게 큰 잘못도 저지른 적 없잖아. 벌을 받아야 할 이유도, 삶을 죗값이라 여길 필요도 전혀 없어. 삶은 달리기 경주 같은 게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같이 걷게 되겠지."

"…아마 앞으로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래, 어쩌면 죽을 때까지."

 

 

 

  마주친 시선에 둘은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살아가며 눈물 흘릴 일이야 생기겠지마는 괜찮았다. 우리는 무고한 열아홉이었고, 흘린 눈물을 닦아내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소년들은 걱정을 그치고 마지막 잔을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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