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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생물
​라씨 씀.

[트리거 : 죽음, 질병, 우울사고, 가스라이팅, 시체 언급]

 

 

 

 

빛 한 자락 없는 곳에 앉은 이가 입을 연다.

그늘에도, 포도 넝쿨이 자랍니까?

투명한 잔에 붉은 액체를 따른다.

믿음으로써 그리될 터입니다.

검붉은 색이 한가득 채워진다.

말라 비틀어진 것 또한 낢입니까.

그러나, 그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조각난 빛이 각각의 색을 입고 비친다.

잘게 깨져버린 긍휼이 잔에 담긴다.

가만히 그 너머를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눈을 감은 탓이다.

 

찬 기가 스미는 계절이 왔다.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를 쫓는 삶으로부터. 드리우는 사망의 그늘로부터. 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부터. 하염없이 밀려나 몸을 숨길 데 없이 헤맨다. 공기를 더럽히는 먼지 덩어리가 하늘에서 뚝뚝 뜯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제 몸마저 더럽히도록 그저 내버려두었다. 그가 지나간 발자국이 지저분하게 남는다. 그의 삶이 유독 그랬다. 날 적부터 죽음을 등에 업고 태어나, 지저분한 잔흔이 눌어붙어 끝끝내 떨어지지 않고 그를 따른다.

질병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늘 그가 홀로 남았다.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을 만치 퍼졌으며, 멀쩡한 곳일지라도 그가 가는 곳은 곧 병이 번져갔다. 그럼에도, 그는 늘 살아남았다. 아픈 데 하나 없이 멀쩡하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차라리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랐으나,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살아있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가는 데마다 병마를 몰고 오는 이. 그러나 소문이 퍼질 만큼의 문명도 남지 않아 오히려 자유로웠다. 무수한 시체를 뒤로하고, 폐허가 된 작은 마을을 짓밟고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어째서 역병에서 빗겨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남기 바빴다. 무너진 건물과 내리깔린 죽음 사이를 힘겹게 헤치고서. 그러면서도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그마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 보니 그늘 아래였을 뿐이었다.

그는 턱밑까지 들어차는 숨을 가누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몇 날 며칠을 걸었는지도 몰랐다. 더는 걷기가 힘들었다. 어디라도 머물 데를 찾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다. 그는 호흡을 정돈한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어지는 폐허는 끝이 없다. 생명이라곤 그마저도 계절을 간신히 이겨내며 서 있는 황량한 나무만이 드문드문 이어질 뿐이다. 

그는 허리춤에 달린 칼을 꺼내 들고 이름 모를 나무의 몸통에 박아넣어 비틀었다. 딱딱한 나무껍질이 뜯겨 떨어진다. 그 안쪽의 그나마 부드러운 나뭇결이 얄팍하게 발려 나온다. 그는 그것을 입에 넣고 씹었다. 입안에 쓴맛이 고였다. 그는 개의치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갈기갈기 찢긴 나무 속껍질이 입을 찔러댄다. 그는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씹으며 그것이 부드러워지길 기다렸다. 목울대가 힘겹게 움직인다. 그는 그것을 간신히 삼켜냈다. 그는 다시 칼을 박아넣고, 삶을 연장하기 위한 행위를 반복했다. 

사위가 흐릿한 까닭이 어두운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진눈깨비인지, 며칠째 잠에 들지 못해 느끼는 착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해가 진 지 오래다. 가로등은 제 명을 다하고 죽어 있었다. 사방으로 그늘이 졌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나 잘못 봤을까 눈가를 문지른다. 확실히, 무언가 보였다. 빛이 있었다. 먼 곳, 무너진 폐허 너머로 흐릿하게 번지는 것.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갑작스레 피가 통한 탓에 찌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빛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억지로 다리를 움직인다. 녹아내린 눈이 발끝으로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딛는 땅바닥이 온전치 않아 헛발질을 했다. 빛이 저기 있다. 부서진 석재에 다리를 긁히고도 아픈 줄을 몰랐다. 한 자락 빛에 구원을 입은 마냥 간절하게, 그 빛 하나만을 바라보고 뛰었다. 어느새 눈은 비로 바뀌어 있었다. 휘청이는 그림자가 마치 빗속에서 춤을 추는 광인처럼 흔들린다. 

눅눅하게 들러붙는 머리카락을 연신 치워내며, 그는 빛이 새어나오는 낡고 거대한 건물 앞에 섰다. 길이가 다른 두 가닥의 선이 수직으로 교차하는 문양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산산조각난 문명의 끄트머리에, 기이할 만치 온전한 모양새를 갖춘 성당이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그 사실에 의문을 품을 만큼 온전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헛손질을 두어 번 한 끝에, 간신히 성당 문이 타격을 받고 느리게 울린다. 문 안쪽에서 반응이 없었다. 그는 조급해졌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린다. 쾅, 쾅. 세 번째로 손이 문에 닿기 전에, 문이 그의 힘에 밀려 열렸다. 낡은 경첩이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질러 대며 그를 맞는다. 천천히, 달빛이 새어 문 안쪽으로 침투한다. 성당에 눌어붙은 그늘이 구물거리며 물러났다. 그 안에 바깥에서 보이던 빛은 없었다. 그는 황망히 서서 눈을 끔뻑였다. 눈꺼풀이 시야를 훔쳤다 돌려놓을 때마다 어둠이 눈에 익어 갔다. 날 적부터 어둠과 함께했던 마냥. 빛은 없다. 그는 여전히 외로이 그곳에 있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신기루처럼 손에 쥘 새도 없이 사라져버린 희망에, 밀려오는 비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짐승과 같이 우짖는다.

그때, 문이 다시 움직인다. 그늘 안쪽에 누군가 서 있다. 유난히 검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찾아왔군요.

그늘진 낯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탓에 현실감이 없었다. 눈물에 가려진 시야가 그 이질적인 감각에 보탬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결국 미쳐 환각을 보는가,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갈라진 목소리 때문에 끔찍한 비명 같은 소리가 제 귀에 들렸다. 그마저도 환시와 환청의 일부 같아서 그는 다시 눈을 끔뻑였다. 

빛 한 자락 없는 곳에 앉은 이가 입을 연다. 죄 갈라지고 부수어진 듯한 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이곳의 주인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우리 주 되시는 분의 신실한 종이지요.

…비슷한 뜻이로군요.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들리는 말이 없어 역시 그러한가 생각할 즈음,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몸 녹일 데를 찾으시는 모양이니.

그는 삐걱거리는 모양새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딱한 바닥에 눌린 무릎이 아렸다. 신부로 여겨지는 이의 모습은 이미 성당의 그늘에 스며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부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황급히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의 평온한 태도가 혼란스러운 바깥의 상황과 달라 흉몽의 꿉꿉함을 영 떨쳐내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수면량에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성당은 그다지 특별한 데가 없었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모양새 그대로, 그저 이곳에 있었을 뿐이다. 도리어 그것이 이상스러웠다.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위엄을 잃지 않은 성당, 그 안에 도사린 정체 모를 신부가. 마치 꿈을 자각한 마냥, 뒤늦게 현실적인 질문들이 속속 올라온다. 가장 첫번째로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냈다.

왜 불 하나 없이 계십니까?

불 켤 시간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시간이요…….

시간을 헤아리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는 비단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질병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서서히 죽음을 몰고 오는 지금, 시간의 흐름을 일일이 기억해두는 행위는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신부가 표한 ‘불 켤 시간이 아닌' 것을 ‘밤’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밤은 그런 시간이었노라고, 그는 굉장히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아까 보았던 빛이 사라진 까닭은 그가 밤을 맞기 위함인가 보다 싶었다. 

속을 덥힐 만한 걸 가져오겠습니다.

내부는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기 때문에, 그는 신부가 입을 열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혼자 생활하던 날이 긴 탓이다. 익숙한 적막을 가르는 잔잔한 목소리. 대답하기 위해 돌아봤을 때엔 이미 그를 등진 신부의 뒷모습이나 보일 뿐이었다. 

그는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그제야 성당의 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 피로가 몰려왔다. 시야가 가물거린다. 그는 이겨낼 겨를도 없이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문득,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늘에도, 포도 넝쿨이 자랍니까?

입을 연 것은 그였으나, 그가 아니었다. 그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꿈이다. 완연하게 비교되는 감각에 그는 아까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느지막이 확신했다. 꿈을 자각했음에도 그는 마음껏 꿈속을 누비지 못했다. 뻣뻣한 움직임을 멀게 느끼며, 개의치 않고서 상황을 관망했다. 다시 입을 연다. 지친 목소리였다. 

그늘 아래의 삶이… 너무도 깁니다.

꿈속 인물은 고개를 들지 않았으므로, 그는 눈앞에 선 이의 낯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이 늘 그렇듯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까지 함께 있던 신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는 낯이 없다. 마치 강한 빛에 도리어 눈이 멀어 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다. 그는 혼몽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 

신부는 말없이 투명한 잔에 붉은 액체를 따른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는 마냥 말이 없다. 붉은 액체가 흘러넘칠 듯 차오른다. 숙성된 포도의 향기가 빠르게 번져 간다. 문득, 그 색이 너무 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든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꿈을 변질시킨다. 내려다본 손끝 또한 붉다. 잔에서 흘러넘친 것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한다. 아니, 무언가 다른 소리가 들린다.

 

툭,

툭.

철퍽.

떨어지는 소리.

꿈 속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꺼먼 하늘에서 병들어 썩은 시체들이 떨어진다. 

바닥에 번진 붉은 액체 위로 하나둘 고인다.

돌아간 목, 드러난 얼굴은… 전부 '그'다.

믿음으로써 그리될 터입니다.

……무엇이?

 

꿈이란 것이 늘 그렇듯, 말이 되지 않는 이상스런 상황에도 그것이 옳다고 느껴진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된 믿음이 잔을 채운 액체와 같이 차오른다. 그의 말 한 마디로 인해, 그늘 속 엉겨붙은 죄악과도 같은 지리한 고난들이 헛되지 않은 수고로 뒤바뀐다. 그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일지라도.

신부는 ‘그’의 머리 위로 잔을 들어 올리고,

그대로 붓는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의식이 깊은 데서 끌어올려 진 듯 급히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래된 성당 내부로 어슴푸레한 빛이 느릿하니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거운 나무의 향을 먼저 느끼고, 후에 공기 중에 날리는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일순간 박제된 유적에 홀로 선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형제님.

신부는 성당의 해묵은 공기를 가르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손에 포도주병과 잔이 들렸음을 뒤늦게 깨닫고, 여즉 남은 몽롱함 너머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각을 거부할 새도 없이 신부는 잔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신부님, 이건….

포도주를 덥혀 왔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검붉은 색이 한가득 채워진다. 그러나 거부감이 들었다. 꿈의 여파인지, 마셔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막연하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다. 동시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 잔을 받았다. 엄숙한 의식을 가장한 부덕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잠시간 붉은 액체에 눈길을 주던 끝에, 그는 느릿하니 잔을 기울인다. 그는 신부의 낯을 바라보지 못하면서도, 신부의 시선을 느꼈다. 집요하고 진득하게 달라붙는 신부의 시선이 마치 피부 위를 기는 뱀과 같았다. 입안으로 씁쓰레한 향이 번져간다. 달큰하고 짙은 과일의 붉음을 혀끝으로 느낀다. 난생처음 맛보는 것임에도, 익숙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한다.

금속의 파열음이 귀를 찌른다. 그는 잔을 떨어뜨린 채, 신부를 마주 보았다. 그제야 신부의 낯이 온전히 보였다. 어둠에 눈이 완전이 익은 듯, 빛 하나 없는 곳에 살아온 듯 신부의 그늘진 눈매와 입가의 미소까지 전부 눈에 들어온다. 눈앞이 어찔하다. 갑작스레 닥친 현기증에 힘이 부쳤다.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 앉는다.

범람하는 기억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해, 그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루, 이틀, 수십 년, 꼽을 수 없는 생애.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병마를 등에 업고서 지나온 모든 삶의 순간들. 그 모든 순간이 그늘 아래에 있었다. 

그는 깨닫는다. 모든 삶 속에 있었던, 신부와, '그', 아니, 그의 모습. 연정혁은 고개를 들었다. 입가를 적신 붉은 것을 닦아낸다. 말라가는 색이 영 곱지 못하다. 연정혁의 척척한 눈가와 패인 뺨, 거뭇한 낯이 완벽하게 온전하고 멀끔히 그려진 신부, 예찬하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는 간절히 자신의 신이 된 이를 바라본다. 

죽음을 몰고 왔으나, 죽음을 피해 살아간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저주를 이고서 무수한 생을 반복하도록, 문명이 서서히 무너지는 시간 동안, 그는 그 속에 있었다. 사망의 그늘을 뒤채고서 자꾸만 숨을 뱉는다. 저의 삶이 곧 죽음의 시작이었음을 알았다. 깨질 듯한 두통에도 그는 낯을 일그러뜨림 없이 유지한다.

말라 비틀어진 것 또한 낢입니까.

꿈을 꾼 탓이다. 언젠가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연정혁은 그 일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의 것이란 사실만이 쥐어진 채, 파편화된 기억 일부가 전염병의 일면과 같이 기어오른다. 그러나, 예찬하는 그저 웃는다. 그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연정혁은 그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말라 비틀어진 것 또한 낢인가? 생각할 의지를 잃고, 생을 갈구했던 지난밤과 같이 구원을 바라듯 신부에게 손을 내뻗는다. 그에게 낢은 곧 죽음과 같았다. 그러니 그늘에 무엇이 나든 무슨 상관이랴. 예찬하를 바라본다. 

구원이자,

비밀이며,

저주 된 자.

그곳에 구원은 없다. 그러나 구원이라 믿으며 나아가는 이 하나 있을 뿐이다. 눈을 감은 채로, 시야에 드리운 어둠이 제게 주어진 전부인 마냥 굴며, 빛 한 자락 손에 쥐지 못하고서 빛을 마주한 것처럼. 빛이 가득하다 믿었으나, 결국 이어지는 것은 밤이다. 불을 켤 시간은 오지 않는다. 

조각난 빛이 각각의 색을 입고 비친다. 어느새 움튼 여명의 빛이 해묵은 성당의 그늘을 걷어내려 비집고 들어온다. 예찬하의 얼굴에 색을 입은 빛이 어릿어릿하게 씌어진다. 과거 창에 박혀 있던 메시아의 모습처럼 서 있다. 신부는 붉은 파편을 튀기며 떨어진 잔을 도로 들었다. 투명한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그 너머로 신부의 낯이 기이하게 비친다.

이제야 나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당신이 지금 허락했기 때문에, 이제야 당신을 볼 수 있었겠지요.

잘게 깨져버린 긍휼이 잔에 담긴다. 그 색을 헤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발치에도 닿지 않는 빛. 여전히 그는 그늘 아래 있다. 개의치 않고, 빛에 선 이를 바라본다. 신부는 가까이 다가와 무릎 꿇은 그의 손을 친히 잡아 일으킨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찾게 하심을 믿었나이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강대한 성당의 벽에 부딪혀 공허히 울린다. 삿된 믿음과 허울뿐인 구원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았다. 여기에, 빛이 있었다. 그리 믿었다. 어디를 살며 무엇을 보고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줄 알면서도. 지친 심신을 기댈 줄만 알아, 빛을 머금은 신부의 낯을 향한다.

가만히 그 너머를 바라본다.

낡은 벽을 덮은 덩쿨이 십자가 끄트머리에 닿아 있었다. 깊은 그늘 속에서도 움튼 넝쿨이 말라 비틀어짐에도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린다. 빛 한줄기 잡지 못하더니, 그 줄기를 뻗어 얽혀 간다. 죽음을 향해 뻗어 가듯, 종래에는 폐허의 부산물이 되어 땅을 부수어낼 것들이.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눈을 감은 탓이다.

그늘에도 마른 포도넝쿨 얽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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