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에 대한 신화
늑 씀.
당신은 전승을 사랑하는가?
수많은 전승을 더듬어 본다. 슬프고 오래된 이야기들 ... ... .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에는 사람이 품은 두려움이 존재할 것이다. 신이 자연에 대한 공포로부터 태어났듯 우리의 익숙하고 낡은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으로부터 태어났다. 그것이 태곳적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출세한 전승과 신화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이 되는가. 즉, 공포와 신성은 무엇으로 가름이 나는가.
다들 한 번쯤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어떤 것은 숭배받으면서 어떤 것은 숭배받지 못하는가. 왜 어떤 것은 사랑받으면서 어떤 것은 멸시받는가. 인간이 전승을 가름하는 기준은 너무나도 얄팍하고 한시적이다. 세대가 지나고 세기가 지나면 금세 흩어져 사라져 버릴 하나의 가름끈을 보라.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한결같이 경고받아온, 인류가 반영구적으로 두려워해온 무언가와 마주치곤 한다. 인간의 분류에 구분 받지 않는 공포가 존재하는 온 힘을 다해 증명하는 것들을 보라. 그렇다면, 어쩌면. 애초부터 그 둘의 근본적인 분류를 판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일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겠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그러니 여기에 신이 아들이 있다. 괴담 같은 남자가 있다. 모든 전승과 신화를 등에 지고 인간을 위해 태어난 남자가 있다. 두려움을 받는 자요 동시에 숭배를 받는 자가 있다. 그가 태어나던 날 가장 큰 별이 그의 머리 위를 비추었으며 그의 아버지 요셉은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기실 그게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 남자의 추종자들이 그를 그렇게 설명하였을 뿐이다. 우리를 구원하러 온, 광야의 메시아! 이 얼마나 화려하고 그리운 호칭인가. 그에 대한 모든 말이 진실되었다면 우리가 수천여 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드디어 광야를 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를 관찰한다. 얇은 모질의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 끝이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와 얇지도 굵지도 않은 일자의 눈썹. 반사되는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삼켜버린 눈동자. 깊은 인상의 얼굴. 묘한 호선을 그린 입매. 끝까지 잠근 셔츠와 정장. 계절에 맞지 않는 장코트. 포멀한 구두. 색은 구태여 묘사할 필요가 없다. 그의 모든 것은 희거나 검었으므로. 예찬하는 그야말로 어딘가에 군림해있는 자의 형상을 했다. 그가 입을 열면 모든 신도는 경례처럼 두 손을 모아쥐고 그의 말에 집중하였다. 누군가는 경건하게 성호를 그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신으로 추앙받는 남자에게 있어 사람들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익숙했다.
익숙했다는 말의 이면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쌓여있다. 돌아와 그의 더 깊은 면을 관찰해본다. 이 땅에는 더 이상 그가 태어나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가 소년 시절 어떻게 웃었는지, 청년 시절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는 그 자체로 괴담이었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인간이란 것이 어디 세상에 흔하겠는가. 수만 번 낮밤이 바뀌고 수천 번 계절이 지나 괴담은 ‘신’이 되었다. 그 순간 더 이상 위의 질문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곳에 신이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 있었으니.
신이 된 예찬하는 신도들의 바람대로 ─바람대로 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으나, 아무튼─ 광야를 떠돌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신도들에 대한 예우는 십몇 년에 한 번 꼴로 돌아가는 편지와 몇십 년에 한 번 꼴로 귀환하는 발걸음뿐이었다.
광야를 떠돌던 도중, 예찬하는 또 다른 괴담을 만난다.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지 못하는, 신에 의해 분류된 전승이 있다. 마을의 사람들은 그를 통칭해 ‘저주’라 하였다. 그 때문에 그 때문에 곡식이 가물었고, 그 때문에 가축이 사라졌고, 그 때문에 마을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하였다. 마을의 사람들은 예찬하를 붙들었다. 예찬하는 간절한 손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한다. 도망가야 합니다. 광야를 건너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저주일랑 이곳에 버려두고, 아니, 콱 죽여버리고 우리를, 우리만을 … … .
예찬하는 ‘저주’를 관찰한다. 눈가를 덮는 길이의 앞머리. 구불거리는 머리칼. 시든 시선.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차림새. 생각보다 어린 얼굴. 멍든 팔꿈치와 무릎. 사람들의 종교 안에 머무는 ‘저주’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말라죽은 곡식과 같은 모습으로, ‘저주’는 예찬하를 바라보았다. 예찬하는 ‘저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보았던 모습들이 필름 위에 필름을 겹치듯 합쳐져 그에게서 관찰되었다.
‘저주’는 기도하듯 예찬하를 향해 자신을 이끌어달라고 하였다. 당신을 믿노라 하였고, 당신을 섬기노라 하였다. 그래서 예찬하는, 이방에 고립되어 살아온 자신의 신도를 굽어 살피고 싶어졌다. 더이상 ‘저주’의 출생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예찬하의 앞에 놓인 것은 이제 ‘저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 옛날 메시아가 사람에게 자유와 믿음과 말씀을 주었듯, 예찬하는 연정혁에게 연민과 자비와 구원을 베풀었다. 엽총의 총구가 연정혁의 등 뒤로 매달린 십자가를 겨누었다. 손가락에 방아쇠를 건 채로, 예찬하는 연정혁을 향해 질문한다. 당신은 저민 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적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왜 그 모든것이 당신을 위해 내려져야 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연정혁은 답한다. 당신이 알게 하심을 믿습니다. 당신이 보게 하심을 믿습니다. 당신이 내리심을 믿습니다. 당신을 믿겠나이다. 동 틀 무렵의 축축하고 어두운 빛이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성모의 상을 지나쳐 십자가의 위로 파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현재를 향해 꽂히는 모든 시간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 듯 했다. 울렁이고 넘실대고 아득한 사어들. 그 가운데 하나의 길로 빛나는 대화가 있다. 무언으로 범람하는 그 앞에서 예찬하는 최후의 선포 같이, 혹은 최초의 명령 같이 입을 연다. 그렇다면, 당신 몫의 빵을 취하십시오. 잔을 들어 포도주로 입술을 적시십시오. 당신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하십시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신을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모든 것을 행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