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계략
쭈임 씀.
[트리거 : 납치]
무릇 원하는 것을 취할 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니라.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죽은 것도 아니기에 그녀의 숨결은 삶이라 불린다. 기거하는 곳엔 생기가 없었으나 영혼이란 것이 떠돌았고 때로는 그곳에 휩쓸린 어리석은 인간의 순수한 생명 그 자체가 흘러 들어오는 것도 드물지만,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젊은 사내의 호기로운 생명의 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이 자명하므로, 언제나 무심한 낯을 하고 있음에도 명왕의 자애로움은 종속을 가리지 않는다는 속삭임이 귓가를 갉작거린다.
어둠의 한구석, 빛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이는 젊은 인간의 시야를 배려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영리한 인간은 함부로 고개를 치들지도, 섣불리 명왕의 이름을 묻지도, 하물며 다 죽지 못한 인간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조급해하는 법이 없다. 그리하여, 명왕은 빛과 어둠, 극단적인 이분법 속 어둠에 속하는 성에 드물게도 환한 빛을 들인다.
왕좌에서 내려온 이는 대답도 없었으나 친히 몸을 움직여 그를 안내했다. 그런 왕의 뒤를 따르면서도 걸음이 단정한 사내다. 침묵을 못 견디는 급한 성정도 아니거니와 인간은 느낄 수밖에 없는 이질감에도 입을 다물고 있음이 명왕의 눈에는 퍽 가소로우면서도 기특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미약한 숨소리가 짐승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부추기는 탓에 이 고요한 명계에도 소음이란 것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거슬릴 법도 한데, 오히려 그것들을 위압감으로 제압시킨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음을 표현했다.
“이곳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도달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답도 없이 사내를 인도하던 명왕은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입을 연다. 화려하게 몸을 감싼 드레스에서도 알 수 있듯 완연한 인간 여인의 형상을 한 명왕의 음성은 높진 않으나 명확한 여인의 것이었다. 심지어 제 처지를 알고 영리한 인간답게 말을 높이는 사내만큼이나 단정한 말투였다.
“때로는 온전하지 않은 죽음을 겪는 영혼이 방문하기도 하죠.”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 한참을 걸려 내놓은 대답에도 사내는 그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무구하게 되묻는 낯이 곱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죽음이 일시적인 것이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으나 명왕은 백 마디의 말보다 짧은 한순간의 침묵을 더 귀히 여기는 이였다. 사내가 그것을 간파한 것인지, 혹은 신중한 성격이 덕을 본 것인지 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명계와는 어울리지 않게 깨끗하고 맑은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킨다. 한 점의 빛도 귀한 지하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듯, 푸른색 눈동자는 제 것과는 확연히 다른 시린 푸른색을 응시했다. 지나치게 비슷한 두 가지 색이 공명하는 순간, 하나가 되어도 이질적이지 않을 색이 일렁인다. 희미한 혈색을 입은 입술이 달싹이는 어느 순간 그녀와 사내가 발을 디딘 공간은 지하 감옥처럼 끝없는 어느 곳이 아닌, 붉은 커튼과 스러질 듯한 장미꽃이 장식된 테이블을 마주하는 식당이었다.
“손님을 끝도 없이 걷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자리를 옮겼습니다.”
손님. 그 짧은 단어로 사내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생각한다. 한낱 인간이 부린 객기로 죽음 앞에서 공평하게 무력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 그것은 영리한 머리로 말도 안 되는 짧은 유추가 가능했다. 저승의 강을 건넌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야말로 무력한 인간 하나가 죽었다고 하여 감히 왕을 마주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꼬였던 실타래의 끝을 찾은 것처럼 희미한 가설 하나가 스쳐 가자, 사내는 그 실의 끝에 구원이 존재한다는 확신도 없이 그것을 붙잡았다. 애초에 저승에 몸을 담그게 된 이유도 어그러졌던 일을 주워 담기 위한 몸부림의 결말이었던 것을, 이보다 더 아래로 처박힐 곳이나 있을까.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닌, 작게 파문이 이는 확신으로 사내의 입가에 단정한 웃음이 걸린다.
“온전치 못한 죽음을 겪은 이가 바로 저라는 뜻입니까?”
사내의 첫 물음이 ‘이곳은 어디입니까? 알 수 없이 길을 잃었습니다.’ 였던가. 명왕이라 불리는 이는 사내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은 이 문장에서 흐름이 달라졌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시선을 또렷하게 마주하지 않고 습관처럼 내리깔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으며 영문 모를 시선을 던지는 이는 숨소리도 내지 않으며 대화의 싹을 그대로 잘라내었다.
단순히 말을 잘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어라 답을 줄 수 없는 물음의 결론을 말하자면, 코웬의 젊은 가주가 살아있음에도 이곳까지 도달하게 된 데엔 명왕의 공이 컸다. 그녀는 자신을 보좌할 영리한 영혼을 찾고 있었으며 시리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신이라 불리는 이를 매료시킬만한 강렬함을 지녔다. 그 시시한 이유로, 그러나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이끌림이라는 이유로 사내의 운명에 의도적으로 일시적인 죽음을 개입시켰음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명왕이라 불리며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한들, 멀쩡한 인간에게 강제로 부여한 운명이 그리 순순히 돌아갈 수 있을까. 단 하나, 몰래 끼워 넣은 톱니바퀴는 언젠가 마모되어 기억이라는 이름의 흔적만 남아 그의 운명을 다시 올바르게 운행할 것이 분명했다. 가사 상태라고 불리는 잠시간이 지나면 그는 완연한 죽음으로 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푸르디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적막 속에서 과실주가 담긴 병의 마개를 열었다. 짙은 향을 내는 액체가 울컥이며 쏟아지는 동안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잔의 절반 정도를 채운 액체가 탐스럽게 찰랑인다. 잔의 가느다란 스템을 잡고 가볍게 흔들자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과실주 특유의 향이 훅 끼쳐왔다. 바닥에 쓸릴 듯한 금빛 머리칼을 늘어트리며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저도 모르게 따라 움직이려던 코웬에게 저지하는 손짓을 보인 그녀가 도달한 곳은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도 않게 사내의 곁이었다.
“알 수 없이 길을 잃었다고 했던가요.”
잘게 부서지는 파도를 품은 눈동자로 사내를 응시한다.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명왕의 음성은 코웬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다시금 찰랑이는 액체가 마치 유혹이라도 되는 양 그녀는 가볍게 식기를 밀어둔 채 무감한 낯으로 식탁 위를 차지한다.
불을 밝힌 명계의 어딘가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내의 눈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묘한 풍경을 눈에 담은 사내의 모습 또한, 잘 다듬어진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그녀를 알 수 없는 충동에 빠져들게 만든다.
과실주에선 달큼한 향내가 풍기고 그녀는 말도 없이 목구멍 너머로 붉은 액체를 삼킬 것을 종용한다. 다정함을 연기하는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대답도 없이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당신만 모르는 것이라면 어찌할 건가요?”
지하의 음식을 먹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은 알고 있을까. 모르지 않을 이유도, 모를 이유도 없었다.
신들의 이야기는 어디서나 시시콜콜하게 떠들기 마련이며, 그것은 때로 우연이나 기묘한 신뢰를 쌓아 진실이 되기 마련이었으므로. 안타깝게도 여인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 인계의 삶에는 사내를 제외한 모든 것을 무관심과 무감함으로 일관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죽음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시간 개념에 둔한 신이라는 위치가 그녀를 묘하게 초조하게 만든다. 가볍게 손짓하는 것으로 허공에 부유하는 모래시계를 만들어낸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뒤집었다. 붉은 피와 같은 과실주가 가느다랗게 흐르며 맑고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시지 않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나요?”
답을 가진 이는 하나뿐임에도 끈질기게 물음이 이어진다. 주고받는 답이 없었으니 쌓이는 건 오롯한 궁금증, 혹은 뒤틀리는 공포였다. 무력한 인간에게 강제로 그 입을 벌려 혈액을 모조리 붉은 과실주로 채워 넣을 수도 있을 텐데,그러지 않는 것은 지하의 왕에게 일말의 정이 남아있거나, 그 정이 조금은 다른 성질임을 뜻한다는 것을 사내는 영민하게 계산한다. 그녀의 손짓이 수틀리면 뒤집어지는 것은 모래시계가 아니라 한낱 인간의 운명이 될 터.
손을 뻗어 닿는 거리엔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와인잔이 존재하고 그보다 먼저 차가운 체온이 사내를 맞이한다. 미형의 얼굴에서 어떠한 전조도 없는 엷은 미소가 그어진 것을 마주한 순간, 부정을 잡아먹은 기묘한 확신이 사내의 선택에 힘을 실었다. 스스로 집어 든 와인잔을 입에 대자 포도주 이상의 달큰한 향에 혀뿌리가 뻐근해진다. 온몸이 저릿할 만큼 감미로운 그 향과 맛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붉은 액체가 입술을 적시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진득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낸 탓이었다.
“이젠 답을 들을 자격이 생긴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여인의 눈가가 좁혀진다. 사내 나름의 도박이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로써 사내는 지하의 것이 되었고 따라서 명왕의 손아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 무구한 인간을 명계로 추락시켰으니, 평화로운 이곳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천진하고도 영리한 사내의 낯은 수없이 보던 빼어난 이들의 것과 분명 다르지 않았으나, 칼날을 숨긴 푸른 눈동자 위에 입 맞추고 싶은 낯선 욕구를 참으며 그녀는 사내의 손가락에 가벼이 입 맞추며 대답한다.
“당신의 삶이 지하에서 영위하길 바라던 신의 욕심에 순순히 잡혀주어 감사합니다, 코웬.”
무릇 원하는 것을 취할 땐, 합당한 것을 내놓아야 하는 법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운명을 뒤틀어 추락하게 하였으니, 단조롭던 삶에 한눈에 반한 사내라는 아킬레스건을 내놓은 그녀는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을까? 길고 긴 영원한 삶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니 지금 바로 결론을 낼 수 없는 난제였다. 따라서 그녀는 제 입에 붉은 과실주를 머금고 사내의 입술에 피와 같은 맹세를 한다. 죽음보다 짙은 삶이여, 지하에도 봄의 터전을 틔우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