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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궤도
​오전 씀.

[트리거 : 소중한 사람의 죽음]

 

“먹을 게 없어.”

 

텅 비어버린 캄캄한 공간을 돌아보았다. 나오는 쓰레기는 족족 폐기했으니, 장소를 채우는 것이라곤 얼마 남지 않은 식량과 마시지 않는 레드 와인 한 병뿐이었다. 그리고 곧 저 음식도 떨어질 것이 뻔했다. 대략 계산해도 하루나 이틀. 앞으로의 우리는 굶주릴 터다. 이 사실을 형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하염없이 창밖을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는 거겠지. 하루를 걸쳐 손을 가득 접어도 넘치는 자유가 영원처럼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 두 시간 사십오 분 오십 초. 그제, 두 시간 삼십삼 분 십칠 초.

지금, 세 시간 이십이 분 이십칠 초.

 

자유를 두고 단어를 논한다면, 이 순간이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식량 창고가 있는 부엌 안쪽 문을 닫고 돌아서니, 단어 그대로 형은 컴컴한 밖을 보고 있었다. 다리 하나 까닥거리지 않고, 가볍게 걸터앉은 채 물 위에서 죽어가는 생선처럼 눈꺼풀만 깜빡거리며 말이다.

나는 그런 두툼한 유리창에 비친 회색 눈동자를 살폈다. 그리한다면 그가 어떤 감정을 띠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반투명하게 보이는 눈동자엔 이동이 미미하지만 살아있는 우주가 가득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더 그려지는 것이 없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조차도 익숙해졌다.

무거운 걸음을 떼고, 입술을 뗐다. 오늘따라 삐걱거리는 우주선 안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수리해야겠지. 요컨대 이 뒤에는 분명 반응이 있을 테니, 자신은 꼭 답을 찾고 말 거라는 나처럼.

 

“형.”

“……응?”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느슨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가 미미하게 웃었다. 창에 비친 사람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조차도 일상이었다. 오늘의 또 다른 작은 소멸을 제외한다면. 몇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면, 그것을 깨워주는 의무가 내게, 있는 것처럼 나는 점검을 마치고,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 다가와 식사 시간을 알렸다. 그것이 싫다 한 적 없으니, 이 사소한 질문은 우리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처럼 어느 순간부터 이어져 왔다. 이럴 때마다 어떤 얼빠진 대답을 해도 좋았을 듯했지만, 좋은 해답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알람을 끈 형이 창가에서 일어나 눈을 맞췄다. 어쩐지 어제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열은 나는 것 같지 않은데. 손을 내밀어 흰 이마에 덮으면 달팽이보다 느린 행동이 이어졌고, 꾹 다물린 입술은 그린 것처럼 일정했다. 그리고 여전히 회색 눈동자에는 검은 것이 가득했다. 우주를 보고 있었고, 이제는 나를 보고 있는데도. 그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 행동도 정답이 아니었나?

“너는 요즘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묻더라.”

그리 중얼거리며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쳤다. 익숙한 샴푸의 향보다, 조금 더 짙어진 살 내음이 코끝을 덮었다. 오늘은 조금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으려나. 요즘의 형은 점차 말수가 줄고 있었다. 식사를 못 해서 그런 거야? 잠자리가 불편했었나. 답해주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물러서지 않는 생각이 오늘따라 다른 길을 걷는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겪고 있는 지금을 인지하고 있기에 괜찮냐는 질문을 붙였다. 형, 진짜 괜찮아? …….

평소와 다른 질문에도 형은 다시금 웃으며 내가 걸어온 부엌으로 걸어갔다. 방금 내가 밟고 지나온 바닥을 그가 밟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기 수리해야 하나 봐. 혼잣말을 들었던 건지, 이제는 평소와는 다른 웃음소리가 조금 크게 들려왔다.

굳게 닫은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더니 숨소리가 그친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금방 입을 뗄 것 같았는데, 형은 다시 창가에 앉은 것처럼 이 분 팔 초를 침묵했다. 오늘 침묵은 유달리 기네. 나는 긴급하게 다가서지 않고 행동을 눈으로 살피다 조금 달라진 호흡에 고개를 기울였다.

“범아. 우주에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냐고 네가 물었었잖아.”

“그 질문은 결국 얼려서 깨거나, ……하여튼 그랬었잖아?”

“너는 어떻게 할 것 같아? 네 계산에도 우리는 오래 살기 힘들 것 같지 않니?”

“힘들어서 그래? 숨겨왔던 비밀 재료로 솜씨 발휘라도 해볼까?”

“그런데 나, 형이 숨긴 건 형한테 허락받아야 하잖아.”

쉼 없이 떨어지는 문장을 아주 소중한 것처럼 쥐고 먼지를 털며 다가섰다.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은 답이 들려와서 그런가, 형은 손에서 힘을 빼고 몸을 돌렸다. 살짝 살피니 꾹 쥔 창고의 문고리에 열기가 남았다. 빼앗긴 온기가 있음에도 평소와 같아 보이는 형은 아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호흡도, 열도 일정해 보이는 남자는 드디어 내 말에 집중하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이런 순간이 너무 오랜만이고, 처음이라 하나하나 눈으로 담고 기록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웃음을 공유했다. 형의 검은 머리카락이 기억보다도 많이 거칠어진 것 같아. 그가 내 혼잣말에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고 턱을 살짝 들자, 과거가 사랑한다고 얘기했던 밝은 회색의 세상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검은 남자가 비침에 집중했다. 나는 분명 형의 눈이 우주의 별 같다고 좋아했었지. 그 빛만은 여전했다.

형이 보는 나는, …….

“네 질문을 되돌려보면, 너는 건강해 보이네.”

“뭐야.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야. 그런 거 없어. 가볍게 젓고, 손을 내밀어 머리칼을 헤집는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오히려 더 애틋했고, 이유 모를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손목을 붙잡으려 손을 올리니, 형은 다시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떨어져 나갔다. 평소에는 잘만 만지게 해주었잖아. 오늘은 왜 그러는데? 익숙한 행동이 아닌 순간이 불편해서 눈썹을 구기는 순간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창고 문으로 다가섰다. 평소에 그 문을 열지 않으면서 말이다. 기분을 대놓고 신경 쓰지 않는 건 여전하구나. 결국 일상으로 돌아온 생각에 실실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형이 요리해줄 것도 아니고, 오늘은 왜 그러는데.”

괜히 헝클어진 머리에 뭐라도 남아있을까. 양손으로 그것을 다시금 헤집고 정리하며 뒤로 성큼성큼 걸었다. 아까 지나친 냄새가 어른거려 몸을 쭉 수그리며 뒤에서 끌어안자, 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딸각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 문은 몇 번의 대대적인 우주선 수리하면서도 형의 하나뿐인 고집으로 여닫이문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왜 좋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형은 아직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리마저 익숙해진 지금은, 그가 돌아보지 않던 장소에 왔다는 긴장감과 품에 있는 온기로 신경이 쏠려 제대로 된 문장을 도출시키지 못했다. 아주 빤한 믿음은 형이라는 익숙함에서 비롯되었다. 냄새, 온기, 촉감. 시간, 추억, 표정. …….

“네가 재료가 별로 없다고 투덜거릴 게 뻔해서 구경하려고.”

아주 옛날엔 스툴 뒤에서 앉아서 구경했던 적이 있지. 요즘은 안 그러지 않았어? 무거운 짐을 뒤에 이고 형이 느리게 걸어가면, 나는 그에 맞춰 뒤뚱뒤뚱 걸음을 뗐다. 그렇게 사람이 들어옴과 동시에 창고 안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갑자기 켜지는 전등에 눈을 구기고 있자니, 제 몸을 억죄고 있는 팔에 손을 툭툭 두들긴 남자가 턱짓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아까 봤던 몇 식재료와 음료가 담긴 병이 있었다. 그러니까 현실을 파악하고자 온 건가. 뭇 빳빳한 판단이 지나가면, 듣기 좋은 목소리가 품에서 울려 퍼졌다.

 

“범아. 기억하고 있어? 너 분명, 와인을……. 안 마실 거랬지?”

“아니지. 떠나는 김에 많은 것을 챙겨보자고 했잖아.”

“…….”

“형이 마시는 양주에, 가끔 피우던 담배에. 기호품은 거의 다 챙기면서, 형이나 내가 그리 마시지 않을 와인을 챙기지 않는 건.”

아쉬울 거라고.

창백한 푸른 점을 떠나는 생존자에게 추억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형은 그런 나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맘대로 하라며 카드를 주려다 한숨만 내뱉었지. 다 죽은 와중에 누가 이런 도덕성을 챙길까……. 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지? 악동처럼 웃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발갛게 변한 뺨을 긁고 있었다. 다가와 카드를 앗고, 제게 없는 자동차 열쇠를 내게서 찾으면서.

 

“아쉬울 거라고?”

“응.”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한 거 아니야? 형이 한 행동은 다 기억하고 있어. 일정한 목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타며 이어졌다. 그 시기에 진짜 재밌었지. 킥킥대며 웃고, 뺨을 비비는 온기는 기억하는 것보다 더 뜨거웠다. 그래서 저 와인 마시고 싶어? 물어보는 목소리는 이내 떨어지는 시선과 함께 익숙한 녀석의 행동을 일깨우고 있었다. 내가 입력한 행동, 그 녀석이 했던 행동들. 한쪽 눈이 더 찡그려지고, 화난 눈썹이 축 처지며 칭찬을 바라는 개처럼 구는 것. 너는 그것을 몹시 훌륭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범아. 내 목소리에 뒤따라오는 검은 눈동자는 기억보다 더 어두웠고, 인공적인 느낌이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본 모습과는 확연히 다름을 인지하자고 했었다. 프로젝트는 성공했지만, 나에게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외견이며 입력된 정보가 누군가와 꼭 닮은 것을 만들어도, 추억을 나눈 사람은 단 한 명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인간을 본뜬 로봇, 인간의 것을 잔뜩 입은 로봇은 과연 같은 사람이고, 인류일까? 진실을 마지막까지 이고 가는 연구원은 자기 피조물에 보다 냉혹하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익숙하게 지구의 시간을 살피며 자자고 어두운 복도를 걷고, 불이 켜진 침실로 다가오며 인상을 구기는 저것은 거울 하나 없는 이 우주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정보를 입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약 없는 믿음을 이어오며, 창에 흐리게 비치는 자신이 어딘가 이상할 수 있음에도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유독 살아있던 너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입력했건 하지 않았건 이 행동만은 꼭 네가 직접 네게로 기억하라 이른 것 같았다.

 

오늘, 세 시간 오십구 분 삼십 초.

 

네게 입력된 시계가 울린다. 우울이 깊어지면 알람을 끄고 일어나야만 한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입술이 벌려졌다. 저를 끌어안고 있던 몸체가 떨어지며 와인을 마실 것이냐며 되물었다. 나는 그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유유히 시간을 늘리려다, ……. 웃고 남자에게서 멀어져 직접 그 병을 들어 올렸다. 내가 만든 너는 내가 먹고 마시는 음식을 입에 넣으면 고장이 날 거야. 그래도 너는 내 말에서 오류를 찾지 못하겠지. 많은 가정을 두들겨도, 너 자신이 네가 아님을 알 수 없을 테니까.

 

“안 마시고 고사 지내기엔 아쉬운 술이니까, 너도 마시자.”

“오늘은 그거 마시고 배 채우려고?”

“네가 얘기했던 내가 숨겨온 창고를 또 열어야겠지.”

“드디어? 며칠 정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나 그것도 계산 안 했는데.”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아주 오래전, 몇 잔을 함께 나눈 뒤로 다른 마개로 잠긴 와인 입구를 두들기며 내밀었다.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서 든 범은 와인이 왜 열려있는가, 보다 양을 가늠하고자 병을 눈가로 치켜올렸다. 이 행동조차 바보 같았고, 익숙해서 다시 입술을 악다물어 웃었다. 너는 그 웃음소리에 시선을 내게로 다시 빼앗고 눈을 맞춘다. 검은 눈에 검은 우주, 작은 회색 별 하나만 아주 미약하게 빛나는 듯했다.

형. ……응? 난 형이 나를 범아, 라고 불러줄 때 가장 좋아.

“……. 그래? 그리고 또 뭐가 좋은데?”

“형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 나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때.”

“……. 와인이나 마셔. 네 말마따나 오늘은 이걸로 배 채우고, 고장 난 바닥도 수리하고 그래야지.”

“응, 나도 사랑해.”

[한 번은 타인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음을 곱씹고 뱉은 적이 있었다. 우주에서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냐며. 그 질문에 형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느냐 되물었다. 썰렁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일그러졌었다. 답변보다 회피, 근본적인 물음이 어디서 되었는가, 였다. 그야 그것은 떠나온 지구를 바라보는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지.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나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매듭지었다. 가동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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